[선비들의 사랑이야기 .17]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백석과 자야(下)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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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5-18   |  발행일 2017-05-18 제22면   |  수정 2017-05-23
“가슴 속 지워지지 않는 이름 백석…1천억 재산이 그의 詩 한 줄만 못해”
밤비에 새잎나거든
20170518
길상사 내 김영한 사당. 사당 건물 앞에는 김영한 공덕비가 서 있다. 작은 사진은 김영한의 노년 모습.

백석은 1938년 학교를 사직하고 조선일보에 재입사한 뒤 서울 청진동에서 자야와 살림을 차렸다. 혼례만 치르지 않았을 뿐 신혼부부와 똑같은 생활이었다. 그러나 백석의 부모는 아들이 기생과 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서로 헤어지게 만들려고 아들에게 또 다른 여자와 결혼하도록 강요했다. 부모의 강요에 못 이겨 그는 고향으로 가서 정혼녀와 결혼식을 치렀다. 자야는 이 소식을 듣고 몰래 이사를 했으나 백석은 다시 자야를 찾아냈고, 두 사람은 만단정회(萬端情懷)를 풀어냈다. 얼마 후 백석은 세 번째 장가를 들었으나 여전히 자야 곁에 있었다.

1939년 겨울 백석은 조선일보에 사표를 내고 북만주의 신경, 오늘날의 창춘(長春)으로 홀연히 떠나갔다. 뛰어넘을 수 없는 가정사와 봉건적 관습 때문이었다. 자야에게 만주 동행을 설득했지만 자야는 거절했고, 결국 혼자 떠났다. 자야는 자신이 백석의 장래를 가로막고 있다는 생각에, 괴롭지만 백석을 혼자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자야는 후일 서로 다시 만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것이 두 사람의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다.

자야는 자신이 백석을 따라가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더구나 백석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정식으로 혼인을 하지도 않은 데다 자신이 기생 노릇을 계속하면서 백석을 도울 만한 일이 별로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홀로 만주로 떠난 백석
틈틈이 詩 쓰고 ‘테스’ 번역 출간
광복후 北 머물며 문인으로 활동
대표작 ‘남신의주 유동…’ 발표

평생을 홀로 지낸 자야
백석 생일날엔 음식 입에도 안대
創批에 기부 ‘백석문학상’ 제정
요정 대원각 시주 吉祥寺 재탄생

◆영원한 이별이 된 백석의 만주행

백석이 만주로 떠나서 몇 해가 지나면 그동안 여러 가지 형편이나 상황이 달라질 것으로 기대했다. 서로 이별한 채로 조용히 지내다 보면 차츰 잡음도 가라앉고 두 사람 사이의 일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부모나 주변 사람들도 무관심해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무심한 세월만 흘러 남과 북이 갈라지면서 다시는 소식조차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백석이 만주로 떠난 후 자야는 인편을 통해 한복 바지저고리와 검정 두루마기 한 벌을 지어서 보냈는데, 나중에 지인을 통해 백석은 항상 자야가 보낸 그 옷을 입고 다닌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백석은 만주에서 여러 가지 생업에 종사하면서 틈틈이 시를 쓰며 보냈다. 토마스 하디의 대표 소설 ‘테스’를 번역해 출간하기도 했다.

1944년 무렵엔 제국주의 일본의 강제 징용을 피하기 위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광산 일을 하면서 숨어 지내기도 했다. 광복 후 한동안 신의주에 살다가 고향인 정주로 돌아온 그는 6·25 전쟁 이후에도 계속해서 북한에 머물게 되었다. 시인 외에도 동화 작가나 번역가로 활동했다.

1948년 10월에는 서울의 ‘학풍’지에 ‘백석 최고의 절창’으로 꼽히는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이라는 시를 발표했다. 이 시를 마지막으로 남쪽에서는 더 이상 그의 시를 볼 수 없었다.

백석은 1960년대 초반까지는 문인으로 활동했으나, 그의 작품이 북한의 이념과 대립된다 하여 북한 문단에서 소외되었고 1996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신의주 유동에 사는 박시봉네’라의 의미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의 일부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 베개를 하고 구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시의 ‘아내와 같이 살던 집’은 자야와 함께 살던 서울 청진동 집을 말한다. 백석이 “이 집에서 평생이라도 살 거야”라고 말하곤 했던 집이다. ‘삿’은 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이고, ‘쥔을 붙이었다’는 주인집에 세 들었다는 의미다. ‘딜옹배기’는 아주 작은 질그릇을 말한다.

자야는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라는 구절에서는 특히 자신의 가슴을 도려내는 듯하다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곤 했다.

월북작가가 아니라 재북작가였는데도 그의 시를 우리가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1987년 해금 후였다.



◆모든 재산을 보시하고 떠난 자야

자야 김영한(1916~1999)은 남북 분단 이후 남한에서 1953년 중앙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뒤에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내 사랑 백석’ ‘하규일 선생 약전’ 등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는 재산을 모아 서울 성북동의 배밭골 일대를 사들여 한식당을 운영했는데, 나중에는 이곳이 유명한 요정 대원각이 되었다.

1997년 김영한은 창작과비평사에 2억원을 기부하였고, 이로 인해 1999년 ‘백석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오래전에 헤어졌지만, 그녀는 평생 동안 그와의 사랑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젊은 날의 사랑을 간직한 채 평생 홀로 살았던 김영한은 매년 백석의 생일이 되면, 하루 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김영한은 노년에 법정 스님의 수필집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스님을 만나본 뒤 인생의 마지막 회향을 생각하고, 1천억원이 넘는 대원각을 시주하겠으니 사찰로 만들어줄 것을 청했다. 그 후 10여년에 걸쳐 사양하는 스님에게 거듭 부탁, 1995년 그 뜻을 이루게 되었다.

1997년 12월 대원각이 길상사가 되던 날, 그녀는 법정 스님으로부터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7천평(2만3천여㎡)이 넘는 절터와 전각 모두를 보시한 그녀의 바람은 길상사가 시민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 되어 찾는 이들의 고뇌가 쉴 수 있는 곳이 되는 것이었다.

김영한은 1999년 11월 이 세상을 이별했으며, 그녀의 유골은 길상헌 뒤쪽에 뿌려졌다. 그녀는 “1천억원의 재산이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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