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칼럼] 팔순의 어머니

  • 조정래
  • |
  • 입력 2017-05-19   |  발행일 2017-05-19 제23면   |  수정 2017-05-19
[조정래 칼럼] 팔순의 어머니

어머니는 희수(喜壽·77세)에 창업을 하셨다. 자녀들과 가족, 전문가의 걱정스러운 만류를 뿌리치고 염소를 키우던 험한 계곡을 형질변경해 대지와 밭으로 바꾸어 놓으셨다. 삐죽삐죽 솟아있던 바윗돌은 축대 주춧돌로 쓰였고, 계곡 중앙을 관통했던 개울은 가장자리로 옮겨졌다. 마을의 모습을 바꾸고 지가(地價)를 올려놓기도 했다. 지금은 집과 공장, 농장이 들어선 당신의 가업(된장공장)은 이처럼 누구도 감히 흉내내기 어려운 추진력과 결단의 산물이다. 땅값보다 더 들어간 토목공사비, 직접 설계한 메주 건조대,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게 한 집의 방향, 아래 위 공장을 연결하기 위한 옹벽 공사 등 모든 설계와 역사(役事)가 당신의 구상에서 나왔다.

경남 함양군 백전면 운산리 중기길 백운산 자락. 앞으로는 지리산을 보고 뒤론 덕유산을 낀, 눈이 유난히 많이 내려 고립되기도 하는 산골. 화전민들이 살았음 직한, 길도 끊긴 막다른 벽촌에 터전을 잡은 것은 물 좋고 바람 맑은 안성맞춤의 길지를 오래 전부터 물색해 온 결과다. 팔순을 지척에 둔 초로의 연세에 간장·된장 공장을 마련하신 것은 우선 60년 동안 단 한 번도 실패해 본 적이 없는 장 담그는 기법을 자녀들에게 온전하게 전수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복안은 3남5녀의 자녀들이 현직에서 퇴직을 한 이후 돌아갈 수 있는 제2의 고향을 만들어 놓자는 원려(遠慮)였다.

된장 담그는 도제(徒弟)로, 초보 농사꾼으로 귀농준비를 해 온 지 어언 3년이 지난 5월 첫 주말 자식들은 어머니의 팔순잔치 ‘산수연(傘壽宴)’을 열었다. 임시로 천막을 친 공장 옥상에 동네 어르신들과 운산마을 교회 목사님과 신도분들, 멀리 김해 가야교회 목사 내외분과 이웃사촌분들, 자식의 친구분들, 친인척 등 많은 분이 오셔서 자리를 빛내 주셨다. 자식과 손자손녀들은 그 자리를 빌려 어머니·할머니의 ‘지난 온 길’을 낭독하면서 이곳을 새로운 고향으로 삼고, 대를 이어가며 당신을 창업 시조로 모시며, 여력이 되는 대로 이 마을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에도 힘을 쏟아 갈 것을 약속했다.

‘41세, 우리 나이로 마흔 하나에 홀로되신 어머니가 3남5녀를 건강한 사회인으로 키워내기까지는 신용이라는 유일한 자산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적지 않은 자녀들 밥 먹이기에도 빠듯한 형편에, 대학까지 다 공부시키자면 여남은 마지기의 농사로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하루하루 살아남기가 전쟁과 같은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평생을 어른을 공경하는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속병을 앓아오신 할머니의 병 구완은 물론, 진주 마당 넓은 집에 살 때에는 우리 집이 동네 경로당일 정도로 동네 어르신들을 모셨습니다. 여름이면 마당에 심은 상추를 뜯고 쌀밥을 지어 어르신들을 대접하곤 한, 동네 어르신들의 며느리였습니다… 저희들을 잘 모르시는 분은 우리 집이 엄청 부자인 줄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훈육대로 건강한 육체를 물려받았고, 노는 사람 없이 모두가 직업을 갖고 열심히 살아가려는 생활인으로서 자립의지를 갖고 있기에, 큰 재산은 없어도 마음이 부자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평생을 근검 절약을 생활신조로 삼고 살아오셨습니다. 남의 것이라 하여, 혹은 주인 없는 것이라 하여 함부로 낭비하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단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습니다. 농사와 도시생활을 같이 하던 젊은 시절 20리 길 5일 장에, 리어카에 열무를 가득 싣고 가서 팔아도 밥값을 아끼느라 허리를 펴지 못하셨고, 시내에서는 어린 동생을 업고 머리에는 보따리를 인 채 걸으시며 시내버스 값 25원을 절약해 오셨습니다. 오늘 여기 이곳 공장과 농장은 물론 저희 3남5녀는 모두, 이러한 어머니의 허기와 피땀을 자양분으로 삼아 생겨나고 자라왔음을 증거하려 합니다.’

고모들이 울고 막내의 한 친구는 하도 서럽게 눈물을 흘려 ‘숨겨 놓은 아홉째’냔 핀잔까지 들었다. 울고 웃는 사이 하루 해는 이울었지만, 그날 눈물샘을 자극한 공감은 자연으로 떠돌지니, 신변고지(身邊雜記)의 쑥스러움을 무릅쓰며 초지를 잃지 않으리라 다짐해 본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