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펫 입문 10일 만에 ‘될성부른 나무’…“설 무대 없지만 오늘도 난 현역”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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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5-19   |  발행일 2017-05-19 제34면   |  수정 2017-05-19
[人生劇場] ‘트럼펫과 한세상’ 유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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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펫뿐만 아니라 매주 목요일 자신의 남산동 사무실을 찾는 가요교실 수강생들의 반주를 위해 피아노도 자주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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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토요일 중부경찰서 근처에 있는 마칭밴드 연습실에서 30여명의 회원을 위해 지휘봉을 잡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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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한 살이라지만 그의 웃음은 여전히 2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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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전 달구벌 악단 시절의 유차목씨.

강 선배의 가르침 때문에 합숙 열흘 만에 3학년 선배 수준의 연주를 할 수 있었다. 소질이 드러난 셈이다. 선배들도 날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트럼펫. 만만해 보이지만 정복하기는 꽤 어렵다. 초보자는 소리조차 낼 수 없다.

실력을 인정받아 고교 2학년 재학 중에 실력파만이 입대할 수 있는 해군군악대에 응시한다. 합격해서 6개월간 진해 군악학교에 입교한다. 거기서 두 명의 고수를 만난다. 훗날 편곡의 1인자로 불리게 되는 군악대장 이교숙, 그리고 MBC악단장이 되는 장익환이다. 대구연예협회지부장을 맡게 되는 차효선은 나와 대구에서 지역 첫 다운비트재즈연주단 멤버로 교분이 지속됐다.

장익환은 군악대 내 스몰밴드의 악단장이었다. 그 밴드를 통해 트럼펫이 도달해야 될 웬만한 테크닉은 다 마스터했다. 이승만 대통령 생일을 위해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만수무강 행진곡도 연주했다. 이를 위해 여의도비행장에서 맹연습을 했다. 지금 생각하니 실소를 금치 못할 일이다. 그땐 꽤 진지했지만.

당시 내 계급은 하사. 근무를 끝내면 영외에서 ‘후생사업’이란 명목으로 미군부대 클럽 등에서 연주를 했다. 스탠더드 팝송, 유명 재즈 연주곡 등을 연주하며 부산 하야리아, 대구 캠프 헨리와 캠프워커 무대 등을 돌았다.

청바지·머플러·헌팅캡 차림의 트럼피터
고1 여름방학 밴드부 합숙훈련서 첫소리
韓 재즈1세대 트럼피터 강대관에게 배워
합숙 끝날 땐 3학년 선배 수준의 연주 선봬

고2때 해군군악대 합격…장익환 등 인연
60년대 부산시향·호텔 나이트클럽 활약
69년 대구로 와 다양한 업소 밴드마스터
80년대 ‘다운비트 재즈연주단’ 창단 주도

스탠드바 ‘남태평양’ 등 잇단 사업 부침
자식 4남매 중 ‘끼’물림한 차녀의 죽음
音樂이 陰樂인 삶이었지만 후회 없어


◆ 드디어 교향악단 단원이 되다

1964년 제대를 하고 부산에 정착한다. 자신만만하게 부산시립교향악단에 들어간다. 하지만 단원 봉급만으로는 살기에 빠듯했다. 밤무대도 챙겨야만 했다. 66년 해운대에 매머드 호텔 하나가 등장한다. 부산 최초이자 전국적으로도 주목을 받았던 특급 비치호텔인 ‘극동’이다. 1층 ‘맥심나이트클럽’에서 꿈같은 시간을 펼칠 수 있었다. 장익환이 이끄는 ‘뮤직스타’란 10인조 악단의 트럼펫 주자였다. 전국 최고의 무대라서 국내 최고급 가수가 총출동했다. 배호, 유주용, 최희준, 패티김, 위키리, 윤복희, 한명숙, 차중락 등이 기억난다. 50분 연주하고 10분을 쉬었다. 재즈, 팝, 스윙, 맘보, 트위스트, 룸바, 지터버그, 트로트 등 다양한 음악을 소화했지만 당시만 해도 국악은 무시했다.

지금과 달리 밴드가 가수를 압도하던 시절이었다. 지배인들도 우리한테 굽신거렸다. 가수들은 늘 잘 부탁한다는 저자세를 취하며 양담배 등을 선물로 안겼다. 밴드 주자 수만큼 악보를 갖고 다녔다. 당시 가장 까칠한 가수는 저음이 좋은 배호였다. 하지만 성격 탓이 아니었다. 지병 때문이란 걸 나중에 알게 됐다.

극동호텔에서 2~3년 있다가 더 좁고 어둑한 세상으로 걸어들어갔다.

68년 부산 동아극장이 백화점으로 바뀐다. 스카이라운지에 ‘블루룸’이란 나이트클럽이 오픈된다. 초대악장으로 러브콜을 받는다. 장익환이 MBC악단장으로 상경한 덕분에 내가 악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이트클럽 연주가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할까, 그렇게 의구심을 가질지 모르지만 50~80년대 대한민국 1급 연주자는 모두 호텔 나이트클럽에 집중돼 있었다. 난 100여곡의 레퍼토리를 갖고 있었다. 악보는 주로 장익환이 넘겨준 걸 사용했다.

당시 밤무대는 카바레와 나이트클럽으로 양분돼 있었다. 카바레는 일본 엔카를 주로 연주했고 나이트클럽은 팝송류에 치중했다. 국내가요는 70년대만 해도 상당히 푸대접을 받았다. 당시 카바레에선 바이올린, 아코디언 등이 필수였고 나이트클럽은 갈수록 전자기타를 앞세운 그룹사운드가 대세였다.

그런데 블루룸은 나와 코드가 맞지 않았다. 이어 경주의 첫 호텔 격인 다보호텔 나이트클럽 밴드마스터가 된다. 부산·경남권에서 트럼펫, 색소폰, 기타, 베이스, 드럼, 키보드 등 멤버 6명을 차출했다. 경부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인 시절이었다.

◆ 69년 대구로 입성하다

69년 드디어 대구로 입성한다. 그때 대구백화점, 동대구역이 오픈되고 있었다. 고고장, 음악다방, 주점문화도 폭발 직전. 나이트클럽 밴드는 선망의 직종이었다. 난 종로나이트클럽에 이어 동성로 런던제과 옆 골목 내에 있던 대호카바레 밴드마스터가 된다.

어느덧 카바레 시대가 개막된다. 광복 직후 50년대 국일, OB, 국제, 대화, 대안 등이 주도한다. 대호는 60년대와 70년대의 가교 클럽이었다.

호텔 나이트클럽과 카바레 밴드는 스타일이 좀 다르다. 카바레는 감상용이 아니다. 플로어 댄스곡 위주다. ‘대지의 항구’ ‘동백아가씨’ ‘흑산도아가씨’ 등 트로트를 춤곡에 맞게 편곡해 연주해준다.

나이트클럽 악단은 명곡 연주 위주였다. 나중엔 나이트클럽도 춤 위주로 변한다. 카바레는 항상 신곡이 실시간으로 투입된다. 손님이 원하는 춤 위주로 가야 하기 때문에 음악성은 차순위로 밀릴 수밖에. 자연 카바레 악사는 상황 대처에 민첩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처절하게 퇴보되면 돈 받고 노래를 즉석에서 반주해주는 ‘오부리밴드’로 추락된다.

대구백화점에는 대구MBC 공개홀도 있었다. 바로 그 위층에 있었던 카바레에도 좀 머물렀다. 그 카바레가 사라지자 76년 대백 11층에 대구에선 가장 파워풀했던 ‘맥심 나이트클럽’이 등장해 9년6개월간 롱런한다. 서울에서 데려온 피아니스트 황중원이 이끄는 풀밴드가 있었고 그 밴드는 훗날 박대욱이 몰고 간다. 나도 트럼펫 주자로 참여한다. 여긴 대마초 파동으로 추락 중이던 조용필을 버티게 해준 무대였다. 패티김은 한일호텔에 숙소를 잡고 장기전을 벌이기도 했다. 통행금지가 있어 밤 11시에 영업이 종료됐고, 난 새벽 2시까지 이어지는 종로나이트에서 한 타임을 더 뛰었다. 당시 내 숙소는 염매시장 내에 있었다.

더 음습한 곳으로 내려갔다. 성당시장 근처에 있었던 ‘성당카바레’ 밴드마스터가 된다. 월급 조로 8만원을 받았다. 이어 성당, 남남, 칠성, 수정, 호수, 동촌, 동방 등 자잘한 동네를 커버하는 카바레가 우후죽순 생겨난다. 당시 카바레의 진풍경은 한복 차림의 아줌마 부대. 당시 여성은 한복을 입으면 공짜였다. 양장보다는 한복을 선호하는 시대였다. 대낮에도 카바레는 동굴 속 같았다. 너무 어두웠다. 옆 사람 얼굴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은밀한 탈선이 쉬웠고 당국은 툭하면 단속질이었다.

◆ 오부리밴드의 애환을 아시나요

대구는 한때 한국 유흥의 메카였다.

나이트클럽, 카바레, 비어홀, 바, 극장식비어홀, 디스코장, 라이브클럽, 회관, 음악다방, 음악감상실, 룸살롱, 요정, 성인텍 등이 공존했던 시절도 있었다. 악사의 애환은 돈에 매달릴수록 더 처량해지는 법. 유랑악사는 사실 ‘3류인생’이었다. 70년대만 해도 그런 악사가 골목에서 심심찮게 목격됐다. 나도 그런 맥락이라서 그들의 심정을 너무 잘 안다.

이 바닥에선 언더그라운드 악사의 수준을 ‘악장’으로 비유한다. 1악장은 호텔나이트클럽 밴드주자, 2악장은 카바레와 회관의 악사, 3악장은 요정과 룸살롱의 오부리악사였다. 그런데 돈은 오히려 3악장이 더 잘 벌었다.

급기야 향촌동으로 입성한다. 황금마차, 왕중왕, 대지바 등이 유명했는데 ‘청자살롱’에 들어간다. 당시 밴드 주자는 모두 5명. 비로소 나도 1곡에 1천원 정도 받고 1절 반주를 해준다. 노래방 시절 이전이라 노래 부를 손님이 줄을 섰다. 노래손님이 없으면 한두 곡 감상곡을 들려주었다.

80년대는 회관 시대였다. 이건 나이트클럽에 카바레를 절충한 스타일. 84년 달성네거리 근처에서 생겨난 ‘부광회관’이 선두주자였다. 80년대 중반엔 ‘카네기’란 극장식비어홀이 돌풍을 일으킨다. 통신골목에선 ‘관광열차’가 붐을 일으켰다.

드디어 내게도 볕이 들었다. 80년대 중반에 동인호텔 근처에 ‘남태평양’이란 스탠드바의 주인이 된 것이다. 세상은 점차 다인 밴드 시절에서 ‘1인 전자오르간 독주시절’로 건너가고 있었다. 나도 사장 겸 오르간 연주자가 된다. 그즈음에 매일신문 김채한 기자, 색소포니스트 김상식과 김일수, 그리고 해군군악대 지인인 차효선과 손을 잡고 대구 첫 ‘다운비트 재즈연주단’을 창단한다. 내가 2년 정도 주도했지만 노선이 달라 다운비트와 헤어진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정치는 꽝이었지만 장사는 정말 잘됐다. 간판만 걸면 돈이 됐다. 서구 평리동으로 가서 ‘뉴반도회관’을 오픈한다. 근처엔 세종회관, 하와이, 올림피아 등이 몰려 있었다. 그때는 트럼펫, 오르간 연주도 하며 손님 신청곡도 반주해 주었다. 끝나면 오전 6시였다. 결혼을 한 처지지만 여전히 하숙생 같은 나날을 보냈다. 집에 가면 아이는 학교에 가고 없었다. 오전 7시~오후 4시 잠을 잔다. 늘 술에 잠겨 있었다. 영업상 손님이 주는 술을 받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난 대구에서 셋째 오르간 독주연주자였다. 지역을 빛낸 오르간 연주자는 서광수, 박석현, 서정하, 백성태 등이다.

90년 1월1일부터 심야영업이 자정까지로 제한을 당한다. 뉴반도회관을 접고 대구은행 본점 뒤에서 ‘흑진주’라는 노래 부르는 주점을 차린다. 이미 가라오케 시대가 도래한 상태. 욱일승천하던 나이트클럽 밴드부터 철퇴를 맞기 시작한다. 반주기가 밴드를 죽인 것이다. 노래방까지 활성화되면서 흑진주도 문 닫게 된다. 흑진주를 팔고 98년 봉덕동 남구청 근처에 ‘금강회관’을 차린다. 9년간 버티다가 그것도 문을 닫는다. 종잣돈을 다 날려 버렸다. 상당수 밴드맨들은 악기를 10분의 1도 안 되는 가격에 처분하고 이 바닥을 떴다. 누군 택시운전사, 또 누군 식당주가 되기도 했다.

더 이상 나 같은 악사를 필요로 하는 무대는 없다. 2007년부터 가야기독병원 가야아카데미 노래교실, 담수아카데미 노래교실 등을 이끌다가 지금 낙동강 하구 같은 남산동 사무실에 안착했다. 한평생 잘 논 것 같다. 음악적 자양분을 모두 나눠주고 홀가분하게 떠나고 싶다. 부고조차 없이.

트럼펫을 불자, 언젠가부터 별빛이 화답한다. 그럼, 이승이 무대고 저승은 객석이 아니겠는가?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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