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단상] 말과 현실, 그리고 소설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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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5-20   |  발행일 2017-05-20 제23면   |  수정 2017-05-22
20170520
박상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문학은 언어로 이루어진 예술이다. 이 단순명료한 사실에서 문학의 문제와 특징, 그리고 의의까지 세 가지가 생겨난다. 문학이 되는 글쓰기와 그렇지 않은 경우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 문제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인 구분을 가능케 하는 데 예술로서의 문학의 특징이 있으며, 이 특징이 우리 시대가 여전히 문학을 요청하는 이유가 된다.

언어란 문학의 질료이기 이전에 우리들이 매 순간 사용하는 기호다. 여기서 문학의 경계 문제가 생긴다. 가까운 예를 들자면, 겉보기로는 딱히 구별할 수 없는 시와 노랫말이 있을 수 있다. 어떤 시는 광고 카피와 비슷해 보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일상적인 글쓰기의 한 토막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소설도 사정이 비슷하다. 작가를 꿈꾸는 젊은이가 소설처럼 보이도록 쓴 첫 습작이 작품으로 인정받기는 쉽지 않을 텐데, 그런 경우 ‘그 글은 도대체 무엇일까’ 질문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문학의 질료인 언어가 우리들 모두에게 매우 익숙한 기호여서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문학작품처럼 보이는 글을 쓸 수 있다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예술임은 엄연한 사실인데, 문학이 자신을 예술로 세우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라 할 수 있다. 하나는 질료인 언어의 표현 형식 자체에 주목하는 방향이다. 언어를 단순한 의미 전달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고, 언어의 사용 방식 자체를 특이하게 다듬어 대상을 낯설게 하고 미를 구현해 내는 것이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조지훈 ‘승무’)라든가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김소월 ‘접동새’)과 같은 시구가 좋은 예다. 다른 하나는 말의 추상성을 뚫고 들어가 사태의 실제를 오롯이 체험케 하는 것이다. 예컨대 ‘사랑의 슬픔’이라 하면 막연한 개념으로 다가올 뿐이지만,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같은 소설을 읽게 되면 사랑에 따른 슬픔의 양상이나 깊이가 뚜렷해진다. 작품의 이야기가 구체적인 현실을 마련해 주는 까닭이다. 이와 같이 일상적인 언어 구사가 지시하지 못하는 것을 형상화하면서 현실의 힘을 드러내는 것이 문학이 예술이 되는 또 한 가지 방식이다. 앞의 경우가 시문학의 일반적인 현상적 특징을 가리킨다면 뒤의 경우는 소설문학의 주요 효과에 해당되는데, 이를 이야기의 힘이라 하겠다.

이야기는 힘이 세다. 이야기는 시공간적 배경을 통해 스스로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그 속에서 서로 관계를 맺는 인물들을 통해 사건들에 현실의 무게를 부여한다. 이렇게 어떤 사태를 구체적인 현실 속의 특정한 사건으로 재현함으로써, 그러한 사건이 실제의 현실에서 갖는 의미와 무게를 온전히 살려낸다. 이것이 이야기의 힘이자 소설문학의 위력이다.

말의 뜻이 흐려지면 사고가 혼란스러워진다. 말이 한갓 기호처럼만 사용될 때 동일한 사태를 두고서도 온갖 다양한 말장난들이 횡행하게 된다. 말이 현실을 떠나 사람들의 입에서 장난감처럼 조작되면 사회의 가치체계와 정의가 흔들리는 지경에까지 이르게도 된다. 말이 혼탁해진 시대, 말이 의미하고 가리키는 바가 공론장을 지배하는 자들의 마음대로 뒤바뀌었던 세상을 우리는 지내 왔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말이 공허하게 반복됨으로써 정상과 비정상이 혼동될 위험에 직면해 보았다.

말 같지 않은 말들이 쏟아지는 중에 말의 의미 체계가 공소해지는 위험에 맞서 말의 뜻을 바로 세우는 근본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말과 현실의 올바른 관계를 다시 찾아서 굳게 하는 것이다. 말의 의미를 바로잡는 이 과정이 가장 자연스럽게, 확실하게, 그리고 재미있게까지 진행될 수 있는 길은 또 무엇인가. 바로 이야기를 읽는 일이다. 현실을 환기시키는 이야기의 힘을 가장 뚜렷이 보여 주는 소설을 찾아 읽는 것이다. 세상의 참모습을 추구하는 소설을 읽는 일은 이렇게, 오늘 우리의 상황으로부터도 요청된다.박상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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