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의 寶庫-호미반도&영일만을 가다 .1] 수필문학 대가 한흑구와 보리

  • 박관영
  • |
  • 입력 2017-05-23   |  발행일 2017-05-23 제13면   |  수정 2017-06-07
파도처럼 일렁이는 보리밭 위로 ‘검은 갈매기’가 너울너울 난다
20170523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사무소 인근의 청보리밭. 흑구 선생은 푸르른 바다와 보리가 조화를 이루며 넘실대는 영일만 일대에서 주로 작품 구상을 했다.

포항이 산업도시의 이미지를 넘어 문화관광도시로 자리 잡고 있다. 2015년 포항까지 고속철도가 연결됐고 지난해에는 포항과 울산을 잇는 고속도로가 완전 개통하면서 포항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수월해졌기 때문이다. 동해안 최대의 도심 해수욕장인 영일대해수욕장과 포항운하는 이미 대표 관광지로 거듭나 포항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은 포항시와 공동으로 포항의 문화관광 명소를 소개하는 ‘스토리의 寶庫-호미반도&영일만을 가다’ 시리즈를 연재한다. 이번 시리즈에서는 동해안 최대의 호미반도와 영일만 일원의 볼거리와 스토리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호미반도와 영일만 구석구석을 직접 걷고, 보고 난 후 느낀 점을 생생하게 정리해 독자들에게 전달할 계획이다. 시리즈 1편에서는 포항에 정착해 집필활동과 후학양성에 주력한 번역가이자 수필문학의 대가 한흑구 선생(1909~79)에 대해 다뤘다.

20170523
흑구문학관 전경. 한국문단의 원로인 흑구 선생과 영일만을 사랑한 그의 작품세계를 기념하기 위해 조성됐다.
20170523
흑구문학관에 내부에 걸려있는 흑구 선생의 사진.
20170523
흑구문학관 내부에는 흑구 선생이 생전에 사용하던 유품들로 재현된 집필 공간이 있다.

바다는 매끄러운 덫, 태양은 영원의 감미로움. 반세기도 더 전에, 이 영원의 덫으로 걸어 나간 사람이 있다. 매일, 조용하고 까만 새벽마다, 그는 집을 나섰다. ‘한 걸음 한 걸음 어두운 이 땅을 조심성 있게 걸어가면서 머지않아 솟아오를 밝은 태양을 맞이하러 바다로 나간다. 동해 중에서도 호수와 같이 반달 모양으로 움푹 들어온 영일만…. 수평선 위에 불쑥 나타나는 새맑고 장엄한 태양의 모습과 길게 물 위로 내뻗치는 황금빛 햇살의 아름다움을 이름하여 옛 사람들은 영일만이라 이름했다고 생각한다.’(1958 ‘여름 아침의 동해’ 中) 그리고 ‘송도 다리를 건너고, 새로 심은 플라타너스들을 눈여겨보면서 영일만 사장(沙場)에 이르렀다.’(1971 ‘한여름 대낮의 움직임과 고요’ 中)

#1. 수필 ‘보리’가 태어난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구만리

영일사장에서 그는, ‘보리밥과 멸치를 싸들고 베적삼과 잠뱅이를 입은 촌사람들’을 보았고 또 ‘원피스나 투피스의 멋들어진 오드리 헵번 타입의 여성들이 뚱뚱한 마카오형 신사들과 몸을 기대고 포항선 볼 수 없었던 자동차로 사람들을 양쪽으로 갈라놓으면서 지나가는 꼴’도 보았다.

그때 포항은 지금의 서산(西山)에서 내항 사이를 시가지로 하는 조그마한 어항이었고, 그 주변은 거개가 보리밭이었다. 보리가 푸르게 일렁이는 봄날이면 그는 벗들과 함께 보리밭으로 갔다. 시인 이육사와, 아동문학가 박이득과, 여러 글 쓰는 친우들과, 그는 영일만의 유려한 곡선을 즈려밟고 구만리(九萬里) 보리밭으로 갔다. 만의 남쪽 끝 호미곶으로 맺음 되는 구릉진 땅 구만리는 하늘과 바다 사이가 전부 보리밭이었다.

한흑구. 60~70년대 중학교 국정 교과서에 실렸던 수필 ‘보리’의 작가가 그다. 박이득은 “흑구 선생은 푸르른 바다와 보리가 조화를 이루며 넘실대는 영일만 일대에서 주로 작품 구상을 했었다. ‘보리’를 쓸 수 있었던 영감도 영일만에서 얻었다. 작품 속의 구절 대부분은 흑구 선생과 함께 영일만의 보리밭을 거닐며 이야기로 나누던 것들”이라고 회고했다.

해가 떠오르는 영일만. 반세기가 더 지나는 동안 많은 것들이 변했고 그 너른 보리밭은 점점 작아졌지만, 그러나 태양과 바다와 보리는 변하지 않았다. ‘춥고 어두운 겨울이 오랜 것은 아니었다. 어느덧 남향 언덕 위에 누렇던 잔디가 파아란 속잎을 날리고, 들판마다 민들레가 웃음을 웃을 때면, 너, 보리는 논과 밭과 산등성이에까지, 이미 푸른 바다의 물결로써 온 누리를 뒤덮는다. 낮은 논에도, 높은 밭에도, 산등성이 위에도 보리다. 푸른 보리다. 푸른 봄이다.’ (1955 ‘보리’ 中) 지금도 구만리는 푸른 보리, 푸른 봄이다.

#2. 검은 갈매기, 흑구

그는 1909년 6월19일 평안남도 평양시 하수구리에서 아버지 한승곤과 어머니 박승복 사이 1남 3녀 중 독자로 태어났다. 본명은 세광(世光)이다. 아버지는 평양 산정현 교회 목사를 지낸 분으로 일제에 저항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도미하여 한인교회 목사로 활동하였으며, 1919년에는 도산 안창호가 미국에서 조직한 흥사단 본부의 의사장을 맡아 활동한 독립 운동가였다.


渡美 뱃길 쫓는 흑구와 조우 한세광
자신의 신세와 닮아 필명으로 결정
귀국후 평양서 독립운동 투옥 고초

1948년 포항 영일만 바닷가에 정착
육사 등 문인들과 보리밭 즐겨 찾아
중앙문단 발끊고 자연주제 수필 써
未堂 “묘한 은둔의 사색가로 사셨다”



1929년 3월, 스무 살의 한세광은 아버지가 계시던 미국 시카고로 건너가게 된다. 일본 요코하마 항을 떠난 지 일주일, 그는 대양의 한가운데에서 수천 마리 검은 갈매기 떼를 보게 된다. 그것은 흰 갈매기보다 배나 크고 큰 독수리같이 힘차게 날고 있었다. 다음 날 갑판에 오른 그는 검은 갈매기 한 마리, 단 한 마리가 긴 나래를 펴고 쫓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하와이까지, 바람이 불거나 비가 와도 한 주일이나 쉬지 않고 쫓아왔다. ‘새 대륙을 찾아서 대양을 건너는 검은 갈매기 한 마리, 어딘가 나의 신세와 같다’고 느낀 그는 이때 자신의 필명을 결정했다. 검은 갈매기, 흑구(黑鷗). ‘흑(黑)’은 ‘다만 외로운 색, 어느 색에도 물이 들지 않는 굳센 색, 죽어도 나라를 사랑하는 부표(符表)의 색’이라고 생각했다.

한흑구는 미국에서 영문학과 신문학을 공부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되는 ‘대한민보’와 ‘동광’에 시와 소설, 평론을 발표했고 여러 도시를 여행하면서 방랑의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1934년 모친의 위독으로 귀국한 그는 평양에 정착한다. 월간잡지 ‘대평양’ ‘백광’을 창간했고 작품 활동도 왕성하게 이어나갔다. 1939년에는 흥사단 사건으로 1년간 투옥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는 식민지 치하의 문인이었다. 문학평론가 임종국은 친일 문학을 낱낱이 파헤쳐 집대성한 ‘친일문학론’에서 일제 35년 동안 문학가라고 부를 만한 사람 가운데 친일 문학에 관계하지 않은 이는 김영랑, 이육사, 윤동주, 한흑구 등 총 15명에 불과하다고 했다.

#3. 동해의 사색가

광복 무렵 한흑구는 평양에서 고당 조만식 선생의 문하에 있었다. 그는 고당 선생의 주선으로 1945년 10월 월남했다. 서울에서 그는 미 군정청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가난한 후배 문인들에게 인심 좋은 선배 노릇을 했다 한다. 3년 후인 1948년 그는 포항 영일만 바닷가로 터전을 옮겼다. 푸른 바다가 보이는 남빈동 530. 그는 “바다도 좋고 경상도 기질도 좋고 술맛도 좋다”고 했다.

그는 포항에 주둔해 있던 미 공군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전란에 폐허가 된 포항여고 교정 복구, 애육시설 확보 등에 힘썼으며 1958년부터는 1974년 정년퇴임 때까지 포항수산대학(현 포항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61년 5·16 이후엔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월급봉투의 절반은 소주 값으로 나갔다. 조금 마신다는 것이 소주 2병. 그것을 ‘병아리가 마시는 물’이라 했다. 다시 펜을 잡은 이후에는 중앙 문단 출입을 하지 않은 채 주로 자연을 주제로 한 수필을 썼다. 칠성천 옆 죽도시장, 영일만이 바라보이는 송도 바닷가, 형산강변도 즐겨 거닐었다. 미당(未堂)은 ‘선생은 스스로 평생을 귀양살이라도 능히 해낼 수 있는 묘한 은둔의 사색가로 사셨다’고 했고 사람들은 그를 ‘동해의 사색가’라 불렀다.

그가 벗들과 즐겨 찾았던 푸른 구만리에 눈부시게 새하얀 건물이 있다. 그 흰 벽에는 까만 글씨로 ‘흑구문학관’이라 쓰여 있다. 옛 구만리회관을 단장해 만든 문학관이다. 전시실에는 흑구 선생의 일대기 및 주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선생이 생전에 사용하던 생활 유품들로 집필 공간이 재현되어 있다. 영상실에서는 1978년 대구MBC에서 촬영한 ‘동해의 검은 갈매기’란 인터뷰 영상을 볼 수 있다. 흑백의 영상 속 흑구 선생은 살아 이야기한다.

흑구 선생은 1979년 세상을 떠났다. 젊은 시절 시인이었던 그는 자연과 생명의 존엄성을 노래하고 삶에 대한 성찰을 담아내는 수필가로 생을 마감했다. 묘지는 영일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흥해읍 죽천2리에 있다. 오월의 구만리 보리밭은 시나브로 황금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저어기 ‘상생의 손’이 아슴아슴 보이고 갈매기들이 너울너울 난다. 선생은 동해안에서 가끔 검은 갈매기를 보았노라고 했다. 문득 하얀 문학관 벽에 새겨진 까만 글씨 ‘흑구’를 본다. 검은 갈매기가 날았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 : 포항시

☞ 여행정보

포항시 동해면이나 구룡포읍에서 호미로를 이용해 호미곶으로 가다 보면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구만길 해안도로에서 한흑구가 거닐었던 보리밭과 만날 수 있다. 이삭이 황금색을 띠기 시작하는 5월 중순이면 이곳 보리밭에서 매년 ‘보리누름문학제’가 열린다. 구만리 시내버스 종점에서 호미곶 방면으로 조금 내려가면 도롯가에 흑구문학관(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호미로 291)이 있다. 문학관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을 열고 매주 월요일과 1월2일, 설날, 추석은 휴관한다. 포항시 북구 송라면 내연산 보경사 경내에는 흑구 선생의 문학비가 있다. 비의 앞면에는 ‘보리’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보리, 너는 항상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