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제주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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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5-25   |  발행일 2017-05-25 제29면   |  수정 2017-05-25
[기고]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제주 전시
박용규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수륙 수 천리 밖의 어리석고 못난 백성이나 우리 또한 나라의 가르침을 받은 백성이라(중략) 고래가 내뿜는 거대한 물줄기나 개미가 등에 짊어진 한 알의 곡식은 그 정성을 다함에는 같은 것입니다.’

구한말 대한제국 정부가 일본에 빌린 국채 1천300만원을 갚을 능력이 없어 연 6부5리의 이자조로 금광 채굴권 등 이권을 일본에 넘기는 다급한 상황이 벌어졌다. 국채 1천300만원은 대한제국 1년 예산과 맞먹는 엄청난 거금이라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가 거덜나고 말겠다는 위기의식에 국민이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서상돈·김광제 등 대구의 유지들이 1907년 2월21일 국민이 돈을 모아 나라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일으켰고 이 운동은 마른 들판에 들불 번지듯 전국 방방곡곡 번졌다.

맨 윗글은 이때 제주도 신재면 함덕리에 사는 김진생 등 7명이 국채보상제주기성회를 조직하고 도민들에게 동참을 호소한 발기문의 한 구절이다. 제주도 국채보상운동은 함덕리뿐 아니라 제주읍 등 제주도 곳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났다. 홍평규 등 20여 명은 제주읍에서 제주단연의성회를 조직했고 삼도리에서는 부인회가 조직됐으며 건입리에도 기구가 조직됐다.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의 지식인이 주도해 일으켰으나 전 국민적 호응을 얻어 계층을 초월한 국민적 기부운동으로 전개됐다. 풀뿌리 서민층이 가장 앞서 호응했고, 대구 남일동 부인회의 패물헌납으로 전국 여성들이 일제히 참여했다. 일반 평민, 상공인, 기생, 백정, 나무꾼, 짚신장수, 걸인까지 참여한 우리나라 최초의 시민운동이었다.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던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이 정신은 1919년 3·1만세운동, 1920년 물산장려운동 등 독립운동의 정신적 토양이 됐고 IMF 외환위기 때 금모으기 운동으로 부활했다.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와 대구시는 110년 전 대구에서 일어난 이 자랑스러운 시민정신을 세계에 알려 모든 인류가 공유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고자 유네스코에 등재 신청을 하고 등재 결정 통보를 기다리고 있다.

이와 함께 우리 국민에게도 국채보상운동의 정신과 자세한 전개 과정을 알리기 위해 지난해 6월 서울 예술의 전당을 시작으로 광주와 부산에서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을 순회전시했고 지난 13일부터 27일까지 14일간 KBS제주방송총국 1층 전시장에서 제주도 전시를 하고 있다.

전시회에 온 제주도민들은 자신들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지금부터 110년 전 어떻게 활동했고 얼마를 모았는지 관심 깊게 살폈다.

제주도민들은 이 자리에서 200여년 전 4년 연속 큰 흉년으로 많은 사람이 굶어 죽을 때 평생 모은 재산을 몽땅 털어 산 쌀 300석으로 전 제주도민을 먹여 살린 김만덕 얘기를 하며 제주의 국채보상운동은 김만덕 정신의 계승이라고 자부했다.

조실부모하고 한때 기녀 생활을 했던 김만덕이 기적에서 벗어나 제주도에서 가장 큰 자산가가 됐고 1791년부터 94년까지 내리 4년 제주에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 때 만덕은 전 재산을 털어 제주도민 전체가 열흘 동안 먹게 했다. 갸륵한 사실을 알게 된 정조가 만덕을 궁궐로 불러 소원을 묻자 금강산 보기를 원해 정조의 주선으로 금강산 구경을 마치고 제주도로 돌아와 74세까지 살다 타계한 나눔의 의인이었다. 만덕의 행장은 당시 재상이었던 채제공이 쓴 ‘만덕전’ 등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1971년 김만덕 기념사업회가 조직돼 전 재산을 바쳐 이웃을 살린 만덕의 나눔 정신을 계승·선양하며 만덕상을 국내외 인사들에게 시상해 오고 있다. 박용규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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