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장미 그리고 찔레

  • 인터넷뉴스팀
  • |
  • 입력 2017-05-25   |  발행일 2017-05-25 제30면   |  수정 2017-05-25
장미와 찔레가 피는 5월은 열정의 계절 그리움의 계절
어느 할아버지의 뒷모습에 유년의 집과 골목 떠올리며 가족·가정의 의미 다시 생각
[여성칼럼] 장미 그리고 찔레

신천 강변의 수양버들 가지에 연둣빛이 돌고, 벚꽃이 피었다가 이울면 봄은 저만치 멀어진다. 짧은 봄꿈을 순식간에 놓쳐버린 허전함을 고맙게도 장미와 찔레가 금방 채워준다. 동안도로 옹벽에 장미꽃이 만발하고 장미넝쿨 사이사이에 찔레꽃이 무더기로 피어난다. 장미와 찔레의 마중과 배웅을 받으며 오가는 길이 근심 많은 세상에서 무거운 짐을 잔뜩 진 사람들에게 살아있다는 기꺼움을 다발다발 꽃으로 안겨준다.

일터 뒤꼍 담장에도 장미와 찔레가 한껏 피어있다. 뜨거운 열정과 아련한 그리움이 서로 자리를 내주면서 어우러진 모습이 사람의 한살이 또는 우리가 사는 세상과 묘하게 닮은 것 같다. 어린이날이 있었고, 어버이날이 있었고, 스승의 날이 있었으며 부부의 날이 있었다. 기뻤고 또 그리웠다. ‘가정의 날’은 그러나 현재진행형이며 영원지속형이다.

장미는 열정이다. 사랑이다. 젊음이다. ‘백만 송이 장미’를 바치는 연인이 없어도 그만이다. 천지에 장미꽃이다. 꽃들이, 꽃봉오리 사이를 지나다니는 바람이 함께 세레나데를 불러준다. 찔레는 그리움이다. 고독한 마음이다. 아련한 슬픔이다. 노란 꽃술을 둘러싸고 있는 하얀 꽃잎은 창백해서 더 서럽다.

계절은 언제나 장미와 찔레를 함께 불러내지만 인간에게는 장미의 계절과 찔레의 계절이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나는 찔레의 계절을 살아간다. 열정은 떠나가고 그리움이 남았다. 어버이날에 갈 데가 없다. 아이들이 찾아오는 부산함 속에서도 시린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가는 느낌이다.

부모님은 다른 세상으로 가셔서 닿을 길 없고 자식들은 오만가지 사정으로 소식조차 없는 쓸쓸한 노년들이 적지 않을 터이다. 고독이 이미 습관처럼 배어서 감정의 초점조차 희미해진 채로 살아가는 어르신들도 많은 게 현실이다. 그 모든 난제들은 사회적 현상과 맞물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러니까 더욱, 물결이 밀려오면 헤쳐 나가야 하고 폭풍우가 닥치더라도 중심을 잡아야 한다. 그게 인생이다. 열정에만 휩싸여서 살 수도 없고 슬픔에 매몰된 채 마냥 허투루 살 수도 없다.

아이들은 장미꽃 속에 있고 나이든 어른들은 찔레꽃 하얀 이파리 속에 있다. 아이는 커서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며 나이 들어서 어른이 된다. 아이는 생명력을 발산하며 아이처럼 살아야 하고 어른은 진정 어른답게 살아야 한다. 모두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공평하다. 그 시간을 잘살아야 하는 것이 권리이며 의무다. 여기에 사회적·경제적인 문제까지 끼어들면 이야기가 길어진다. 사람의 문제, 시간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장미와 찔레가 지고 나면 신천에 접시꽃이 피고, 코스모스가 핀다. 꽃이 이울면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진다. 마침내 벗은 가지에 눈꽃이 핀다. 그것이 순리다.

어느 날 해저물녘, 일터 앞에 할아버지 한 분이 하염없이 앉아 계시는 걸 보았다. 낡은 모자와 지팡이를 옆에 놓고 도로를 향해 멍하니 앉아계셨다. 할아버지의 굽은 등을 몇 걸음 뒤에서 바라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등이 무언으로 전하는 무수한 언어들이 흔히 말하듯 소설 몇 권은 되고도 남을 것 같았다. 사람은 얼굴보다 등에 더 많은 표정을 함축하고 있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땅거미가 내려오도록 한참을 그렇게 계시더니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짚으며 느릿느릿 일어나셨다. 플라타너스 한 그루 한 그루를 천천히 지나서 할아버지는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제법 어두워졌다. 집이 너무 멀지 않았으면 좋겠다. 집에 따뜻한 밥상이 차려져 있고 잔소리하는 할머니도 계시고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와 강아지까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요즘은 보기 드문 가정풍경을 그려보며 그 옛날 유년의 집과 골목길을 떠올렸다. 그 집에서 많은 식구들이 온갖 소리를 내며 살고 있었다. 부엌 앞에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 장독대가 있었다. 이맘때쯤이면 장독대 뒤 담장에 들장미와 찔레가 피었다. 장미와 찔레의 계절 5월을 보내며 가족·가정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허창옥 (수필가)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