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청송 덕천마을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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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5-26   |  발행일 2017-05-26 제36면   |  수정 2017-05-26
만석꾼 집 솟을대문 열리는 소리에 아침 해 ‘화들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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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소고택과 송정고택. 송소고택은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250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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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골등천. 산에서 내려오는 이 물길을 경계로 덕천마을은 윗골과 아랫골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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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고택 곳곳에 놓인 검정고무신과 꽃돌로 만든 두꺼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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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색 박공지붕의 덕천교회. 종탑에 무쇠종이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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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마을의 재실인 경의재. 악은공 심원부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사방 산인 마을이다. 마을 앞에는 천이 흐른다. 조선시대 만석꾼이란 호칭으로도 모자라 이만석꾼이라 불렸던 송소(松韶) 심호택(沈琥澤)의 자손들이 사는 마을, 고택들 즐비한 슬로시티 덕천리다. 마을은 조선 500년 동안 정승이 열셋, 부마가 넷, 왕비를 넷을 배출한 청송심씨(靑松沈氏)의 본향이기도 하다. 막 세수를 한 듯 깨끗한 동네를 걷다보면 느릿느릿 소곤소곤 말 없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부나 명성에 대한 찬(讚)만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에 전해지는 오래된 이야기, 현재를 사는 오래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 청송심씨의 본향 덕천마을

천을 건너야 마을로 들어갈 수 있다. 다리는 셋. 914번 지방도상에 있는 상덕천교를 건너면 마을의 왼쪽 끝이다. 도로 건너에 마을을 내려다보는 소류정(小流亭)이 있다. 구한말 청송 의병대장을 지낸 소류(少流) 심성지(沈誠之) 선생이 제자들과 함께 학문을 연구하던 곳이다. 덕천1교는 마을의 중앙부로 통한다. ‘청송심씨본향’이라 새겨진 바윗돌이 있고 마을의 공동 쉼터인 ‘공마당’이 있다. 청송나들목으로 나왔을 때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경의교다. 마을의 오른쪽 끝으로 그곳엔 청송심씨 재실인 경의재(景義齋)가 자리한다.

경의재에는 악은공(岳隱公) 심원부(沈元符)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공은 고려 말(1391년)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등을 돌리고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간 분이다. 당시 공은 아들 3형제에게 ‘나라도 망하고 임금도 잃었으니 너희들은 조상이 묻혀있는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고 글을 읽으며 시조선산(始祖先山)을 지키며 살아가라’는 유훈을 남겼다. 청송심씨는 그의 후손들이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그들이 악은공의 뜻을 받들어 이곳에 터 잡은 것은 1400년대를 전후한 때라 짐작된다.

경의재 앞 벚나무 가로수 길에 푸른 그늘이 맑다. 길가 버드나무 몇 그루 선 숲속에는 연못과 정자가 호젓하다. 연못은 원래 농사를 지을 때 물을 가두어 두던 아주 작은 저수지 ‘둠벙’이었다. 가물어서인지 연못에 물의 기미는 없고 주변은 강인한 풀들이 점령해 있다. 푸른 그늘의 끄트머리에 액운을 막기 위해 만든 ‘조산무더기’를 지나면 환하게 마을이 열린다. 마을 한가운데 땅은 논이 차지했다. 기와지붕인 집들은 낮은 산 아래에, 근현대의 집들은 대개 천변에, 모두가 남쪽을 향해 있다.

정승 13·왕비 4명을 낸 청송沈氏 본향
요골등천 경계로 윗골·아랫골 나뉘어

윗골의 1880년경 지은 99칸‘송소고택’
13년간 수십 인부 움막 숙식하며 세워
이웃한 찰방공 종택·송정고택 등 개방


◆ 오늘에 전해지는 오래된 이야기

마을 회관과 커다란 광장과 마을 체험관을 지나고, 편지를 부치면 일년 뒤에나 전해진다는 느림보우체통 앞에서 길은 마을 뒷산 쪽으로 꺾인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길 옆 좁다란 물길을 타고 흐르는데 역시 가물다. 이 물길의 이름은 ‘요골등천’. 이것을 경계로 윗골과 아랫골이 나뉜다. 확성기가 없던 시절 목청 좋은 사람이 이곳에서 마을 소식을 알렸고, 명절날 윗골과 아랫골이 줄다리기를 할 때도 이곳을 경계로 힘을 겨뤘다고 한다.

요골등천의 오른쪽인 아랫골에는 1806년 무렵에 건립한 초전댁(草田宅)과 일제 강점기인 1917년에 지어진 창실고택, 청송심씨 12세 손인 심응겸(沈應謙)이 학문을 연구하면서 쉬던 요동재사(堯洞齋舍)가 자리한다. 집 앞에는 작은 논밭이 펼쳐져 있고 요즘에는 보기 어려운 원두막이 천연스레 서 있다.

요골등천의 왼쪽인 윗골에는 유명한 송소고택이 있다. 송소 심호택이 1880년경 세운 아흔아홉 칸 대저택이다. 사실 덕천마을을 찾은 누구라도 가장 먼저 걸음 하는 지남철 같은 집이다. 13년간 수십 명의 인부가 집 앞에 움막을 짓고 먹고 자며 지었고, 이 집 대문 여는 삐그덕 소리로 마을의 아침이 열렸다고 한다. 집은 25년 정도 비워져 있었다. 그사이 풀은 사람 키만큼 자랐고 도둑은 대청마루의 팔각무늬 문까지 뜯어갔다. 지금 송소고택에는 청송심씨 11세손이 산다. 집은 강건하고 윤기가 난다. 주인 내외는 매일 기름칠로 청소하며 윤을 낸다.

송소고택의 오른쪽에는 찰방공 종택이 자리한다. 악은공의 9세손인 심당의 종택이다. 송소고택의 왼쪽에는 송정고택이 이웃한다. 심호택의 차남 집으로 1914년에 지어졌다. 마루에 걸려 있는 오우당(五友堂) 편액은 의친왕의 글씨고, 독립 운동가 이범석 장군이 종종 찾아와 머물렀다고 한다. 집안 곳곳에는 꽃이 그려진 검정고무신과 신비로운 청송 꽃돌로 조각한 두꺼비들이 앉아 있다. 덕천마을의 고택들은 대부분 개방되어 있다. 사람들이 와서 마당을 밟아 주면 땅이 다져져 풀이 안 난단다. 활짝이 대문 열린 마당마다 꾹, 꾹, 걸음을 보탠다.

◆ 오늘을 사는 오래된 사람들

천변으로 향한다. 상덕천교 앞 천변에는 오래전 주막이 있었다는 푯말이 있다. 덕천1교 쪽으로 가다보면 흙을 다져 돋운 제방에 굵은 둥치의 나무들이 일렬로 서 있다. 제방의 이름은 ‘진천방’. 마을로 치고 들어오는 큰물을 막기 위해 쌓았다. 그 덕에 마을의 땅은 조금 더 넓어졌고 그 덕에 심 부자는 아흔아홉 칸의 저택을 지을 수 있었다.

제방 아래 집들은 대다수가 현대식이다. 감색 박공지붕의 덕천교회는 1957년에 세워졌다. 교회는 돌담에 둘러싸여 있고 종탑에는 무쇠종이 달려 있다. 고샅길 담벼락은 낮고 집집마다 작은 문패가 자리한다. 한계댁, 댕미댁, 영양댁, 옥산댁, 지경댁, 창실댁, 예천댁, 송정댁 등. 하나하나의 이름들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을 터.

거대댁이 느릿느릿 이야기한다. “고추 농사를 지어 50근을 머리에 이고 청송장에 팔러 갔어. 아무리 힘들어도 고추 자루를 머리에서 내려놓고 쉴 수가 없는 거야. 일단 머리에서 내려놓으면 다시 머리에 일 수가 없었거든.” 지경댁이 소곤소곤 말한다. “싫고 좋고가 어딨어? 결혼하라니까 했지. 결혼식 날 밤, 족두리를 쓰고 돌아 앉아 있는데 신랑이 안아서 신혼방으로 들어갔어. 그런데도 부끄러워서 얼굴을 쳐다볼 엄두를 못 냈어. 첫날밤을 치르고도 얼굴을 못 봤어.” 참 옛날 일이다 싶은, 오늘을 사는 오래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마을에는 약 6.2㎞의 ‘덕천마을 큰 내 이야기길’이 조성되어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길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스토리보드를 통해 전해들을 수 있다. 참, 경로당 총무인 70세 넘은 예천댁이 실제로 하는 일은 고스톱 치는 선배들을 위해 청소하고 간식 만드는 일이란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중앙고속도로 안동 방향으로 가다 안동분기점에서 영덕 방향으로 간다. 청송나들목에 내려 31번 국도 청송읍 방향으로 5분 정도 가면 오른쪽에 파천초등학교가 보인다. 학교를 끼고 우회전해 덕천교를 건너고 조금 더 가 경의교를 지나면 덕천마을 경의재다. 승용차는 경의재 앞에 주차할 수 있고, 가로수길 지나 마을 안 송소고택 앞에도 세울 수 있다. 마을의 고택에서 숙박할 수 있으며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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