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단상] 뜻깊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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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6-03   |  발행일 2017-06-03 제23면   |  수정 2017-06-03
[토요단상] 뜻깊은 집
홍억선 한국수필문학관장

한국수필문학관은 대구에 있다. 서울이나 부산, 광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구 한복판 중구 봉산동에 있다. 수필문학관을 건립할 때 타 지역의 견제가 제법 있었다. 선점을 당한 탓인지 문학관 이름을 ‘한국’이라고 부르지 말고 ‘대구’로 좁혀 쓰라는 압박도 있었다.

한국수필문학관이 대구에 있다는 자부심과 더불어 한 가지 더 뜻깊은 사실은 최초의 개별 문학장르 문학관이라는 점이다. 우리나라에는 지역이나 문인의 이름을 딴 문학관은 곳곳에 많지만 아직까지 시문학관이나 소설문학관, 아동문학관 같은 것은 없다.

한국수필문학관은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영남 유림의 본산인 대구향교를 마주 보고 섰고, 지하철 1·2·3호선이 가까이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에 있다. 원래 그 자리는 3층짜리 병원이 있던 곳이다. 가정의학과 병원이었는데 주로 산부인과 진료를 50년 가까이 했던 곳이다. 집을 팔겠다는 말을 듣고 둘러보았을 때 손바닥만 한 입원실이 여남은 개나 있어 한때는 귀한 생명들을 받아냈던 의미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뒤로 재고, 아래위로 보아도 문학관이 들어서기에는 딱 좋은 자리였다.

중개소 어른을 앞세우고 주인을 만나러 갔을 때 칠순이 넘은 원장이 홀로 집을 지키고 있었다. 백발의 원장은 꼿꼿이 앉아 이 집이 그래도 명문가였다고 자부심이 대단했다. 시어머니는 효성여대 가정과 교수를 지냈고, 남편은 대구대학 공대 교수였다고 했다. 큰아들은 울산에서 치과의사를 하고, 작은아들은 두바이에 있는 외국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딸은 부산에서 피부과 의사와 살고 있다고 했다. 대구의 명문가로 여성잡지 몇 군데에 소개된 집이라고도 했다. 지난해 남편이 급히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혼자 지낼 수 없어 병원도 폐업하고 큰아들 곁으로 간다고 했다. 주변에서 이 집을 사겠다는 이가 몇 있어 밀고 당기는 중이라고도 했다.

흥정을 돕기 위해 함께 간 중개인과 일행을 밖으로 내보내고 주인과 둘이 마주 앉았다. 요란스러워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집을 꼭 사야겠으니 부디 내 말 좀 들어보시라고 했다. 다른 걸 하는 것이 아니라 글을 읽고 글을 쓰는 집을 짓고 싶다고 했다. 돈벌이 장사하는 곳이 아니라 사람 사는 향기를 불러 모으는 문학관을 짓겠다고 했다. 가진 돈은 이것밖에 없으니 어쩌면 좋겠냐고 했다. 내가 내민 돈은 이웃과 흥정하고 있다는 시세보다 거의 1억원이나 적은 액수였다.

그런데 뜻밖의 반응이 나왔다. 주인은 망설임 없이 이 집을 당신에게 주겠다고 했다. 얼핏 보기에 마음이 조금 들떠 보였다. 우리에게는 남다른 깊은 사연이 있는 집인데 팔더라도 험한 발걸음이 드나드는 곳에 주기 싫다고 했다. 이왕이면 학문하는 사람들이, 글 쓰는 사람들이 들어오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부탁의 말을 덧붙였다. 병원 건물 뒤에 별관주택이 있는데 불가피하지 않다면 뒷집만큼은 허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건축과 교수였던 남편이 직접 지어서 벽 두께가 40㎝가 넘을 정도로 튼튼하다고 했다. 그 집에서 온 가족이 안온하게 이런저런 사연을 쌓아왔기에 떠나가도 애틋할 것이라 했다.

웬만하면 허물지 않겠노라고 화답을 하고 나 역시 부탁이 있다고 했다. 약속한 집값을 보내 드릴 테니 문학관을 건립하는 좋은 사업을 위해 원장님께서 후원을 좀 해주십사고 했다. 주인은 쾌히 1천만원을 보내주겠다고 승낙했다. 이렇게 하루 전날 집을 둘러보고 그다음 날 문학관 부지를 마련했으니 보통 인연은 아닌 듯했다.

병원을 허물고 터를 마련할 때 중간중간 사진을 찍어 울산에 사는 원장님에게 보냈다. 1층이 올라가고 또 한 층이 올라갈 때마다 사진을 보냈다. 그사이에 두바이에 산다는 아들이 다녀갔고, 부산에 있는 딸이 와서 가족이 살던 뒷집이 남아 있음을 감사해했다.

수필문학관은 관에서 주관하거나 무슨 단체에서 돈을 들여 세운 집이 아니다. 비록 작고 부족한 집이지만 글을 쓰는 사람들이 뜻이 있어서, 그리고 뜻을 모아 10년 넘게 준비하여 지었다. 좋은 자리를 만나고, 좋은 마음을 만나고, 뜻깊은 사연을 담아 지어 올린 집이다.홍억선 한국수필문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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