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웅의 나무로 읽는 삼국유사] 경주 계림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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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6-09   |  발행일 2017-06-09 제39면   |  수정 2017-06-09
신성한 활엽수 숲에 오늘은 아이들 웃음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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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 온 꼬마들이 천주천에서 신나게 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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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가 굽어 고목이 된 참빗살나무의 푸른 생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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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된 회화나무. 청춘의 나이테를 버리고 부름켜로 생명을 피워내는 감동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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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 비각 안의 참느릅나무. 아들이 부모를 봉양하는 듯하다.

계림(鷄林)은 경주를 대표하는 신성한 숲이다. 계림의 신성한 기운은 느릅나뭇과의 느티나무, 팽나무, 참느릅나무, 콩과의 회화나무, 버드나뭇과의 왕버들 등의 활엽수종이 만들어낸다. 계림의 본래 이름은 생명이 탄생하는 숲을 의미하는 시림(始林)이었다. 경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탄생한 계림은 신라 신화의 현장이다. 계림은 김알지가 닭 울음소리와 관련해서 탄생했기 때문에 붙인 것이다.

일연 스님이 편찬한 ‘삼국유사’에는 계림에서 탄생하는 김알지 신화가 수록되어 있다. 석탈해왕 3년(영평 60) 8월4일 밤에 호공이 월성 서편 동네를 거닐었다. 그런데 시림 속에서 큰 광명이 나타났으며 이때 붉은 구름이 하늘에서 땅으로 드리워졌다. 구름 가운데 황금궤가 ‘나무’ 끝에 걸려 있었는데 빛이 사방으로 퍼졌다. 그 주변에는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신비로운 이야기를 호공에게서 들은 왕이 시림으로 가서 궤를 열어보니 그 속에서 아기가 나왔다. 그래서 아기를 왕궁으로 데려가 태자로 삼았으나 뒤에 파사에게 왕위를 양보한다. 계림의 금궤에서 출생했다고 하여 성을 김씨라 하고 이름을 ‘알지’라 불렀다.

나무에 걸린 금궤서 김알지가 태어난 곳
‘鷄林’은 궤 밑에서 흰 닭이 운 데서 유래
본래 이름은 始林…‘생명 탄생의 숲’ 뜻

비각 안 참느릅나무·500년 된 회화나무
25種이 ‘더불어숲’ 이뤄 상서로운 기운



신성한 계림에서 출생한 김알지는 왜 태자에 책봉됐으면서도 왕위를 파사에게 양보했을까? 김알지는 신화적 인물이면서도 신라왕으로 등극하지 않는 특이한 이력을 보여준다. 그는 신성한 시림에서 탄생했지만 기존의 박씨와 석씨의 세력을 고려해 왕위를 양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자신의 후손이 신라왕으로 등극하게 되면서 ‘신성화’ 작업이 첨가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때문에 김알지가 탄생한 계림은 신화와 역사적 공간으로 매우 중요하다.

김알지의 후손들은 열한, 아도, 수류, 욱부, 구도 등으로 계승되었다. 나중에 구도의 아들인 미추가 김씨 중에서 최초로 신라왕으로 등극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제13대 미추왕은 이서군의 침략을 물리친 대나무의 충절을 상징한다. 신라의 김씨 왕조를 확립한 인물이 바로 내물왕이다. 계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천주천을 건너면 내물왕릉이 보인다. 내물왕릉 주변에는 계림의 숲과 달리 소나무가 많다. 소나무는 내물왕릉을 수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문인화가 조속(趙涑, 1595~1668)은 김알지가 계림의 금궤에서 탄생하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남겨놓았다. 조속의 ‘금궤도(金櫃圖)’에 등장하는 ‘나무’의 이름은 무엇일까? 그림 속의 나무를 정확하게 판독하기 어렵지만 활엽수인 것만은 분명하다. 계림에는 느릅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등의 활엽수가 아름드리 자란다. 이런 나무에 금궤가 걸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더욱이 계림의 비각 뒤편에는 참느릅나무 두 그루가 살고 있다. 그중 키가 큰 참느릅나무는 기울어져 있고, 키가 작은 참느릅나무는 가지를 벌려 마치 부모를 부양하듯 키 큰 참느릅나무를 받치고 있다. 비각 안의 참느릅나무는 김알지의 탄생 신화와 연관된 신성한 나무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 초기에 전국을 유람한 방외 지식인 김시습은 경주 계림에서 출생한 김알지의 후손이다. 계유정란과 세조의 왕위찬탈의 역사적 격변기에 전국을 떠돌던 김시습이 처음으로 정착한 곳이 바로 경주이다. 경주는 자신의 조상인 김주원이 원성왕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떠나온 고향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터 잡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김시습의 ‘유금오록’에 수록된 ‘계림’에는 “석씨가 끝나는 때 태자가 없어/ 하늘 닭이 금궤에다 상서를 내렸네/ 쪼개보니 훌륭한 신아(神兒)가 나와서/ 주기(主器)를 간고(幹蠱)하여 가업이 창성했네”라고 읊었다.

김알지가 탄생한 계림은 산책하기 좋다. 활엽수들이 새순을 세상 밖으로 내미는 봄날의 산책은 생명체의 탄생을 목격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하다. 더욱이 보름달이 둥실 떠오르면 계림은 더욱 신비롭다. 그 옛날 호공이 시림에서 광명을 목격했던 밤에 산책하는 기쁨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어둠 속에서 고요하고 평화롭게 잠자던 나무들의 반짝임이 더욱 신비롭게 보였다. 달밤에 계림을 산책하면서 타인을 밝혀주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계림에는 500년 동안 숲을 지켜온 회화나무가 있다. 늙은 회화나무는 눈부신 청춘의 나이테를 심재(心材)에 새겨 놓았지만 세월과 함께 모두 사라졌다. 인공적으로 만든 심재에 의지해 부름켜로 숨만 쉬는 회화나무를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럼에도 늙은 회화나무는 자신을 비관하진 않는다. 생명이 약동하는 봄날에 회화나무는 새싹을 통해서 생명의 소중함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자연숲의 기능을 상실한 계림에는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신화적 공간인 계림은 휴식하거나 산책하기에 적당하기 때문이다. 계림 답사에서 우연히 만난 이스라엘 여성 레이첼이 기억에 남는다. 그녀는 신화적 현장에서 나무를 안고 대화해 보라는 나의 요청을 그대로 따라주었다. 아무런 의심도 없이 계림에서 느티나무를 안은 레이첼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계림은 외국인과도 소통할 수 있는 신비로운 매력을 가진 신화적 숲이다.

인간의 간섭으로 김알지가 탄생한 신비로운 숲이 훼손되고 있다. 속이 썩은 왕버들 사이에서 허리가 굽은 노박덩굴과의 참빗살나무는 지지대에 의지해 생명을 지피고 있다. 늙은 참빗살나무의 가녀린 생명이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생명체의 탄생과 죽음이 반복되는 계림에서는 나무들도 거침없이 사랑을 나눈다. 계림의 모퉁이에서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격렬하게 포옹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김알지가 탄생한 신비로운 계림에는 25종의 다양한 나무들이 ‘더불어숲’을 이루며 살아간다. 내가 속한 나무세기 회원들과 함께 계림의 나무를 한 그루씩 세어보는 생태공부를 한 덕분에 25종을 확인했다. 이렇게 나무를 통해서 계림의 생태적 가치와 신화적 상상력을 재인식하는 것이 생태인문학의 첫걸음이라 생각한다.

경북대 기초교육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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