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초여름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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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6-12   |  발행일 2017-06-12 제30면   |  수정 2017-06-12
진짜 초여름 그늘 같은 삶은
내가 그늘을 만들어 주는 것
유명인 초대도 중요하지만
가능한 많은 지역예술가에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의미
[아침을 열며] 초여름의 그늘
최현묵 대구문화 예술회관 관장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초여름의 그늘 같은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사실 봄날의 그늘은 아직 춥고, 여름날 그늘은 덥다. 그러나 초여름의 그늘은 몹시 뜨거운 날일지라도 그 안은 시원하다. 그리하여 그곳으로 들어서면 상쾌한 기운으로 기분이 좋아진다. 초여름의 하늘과 숲은 어떠한가. 하늘은 더없이 푸르고 숲은 짙어질 대로 짙어진 초록의 향기로 가득하다.

그런데 초여름의 그늘 같은 삶이란 무엇일까? 아무런 걱정이나 근심도 없는 일상이 아닐까? 중간고사도 없고, 취직시험도 없다. 다가오는 현금서비스 결제 걱정도 없다. 오히려 아무 일도 없어서 그저 무료할 수도 있는 날들. 감기 정도 들었음에도 무슨 중대 질병에 걸린 듯 엄살을 부려가며 아내의 동정을 이끌어내려는 저녁의 어느 날 풍경. 놀이터에 아이들 소리는 높고, 강아지들은 이리저리 애교를 부리며 주인의 뒤를 쫓아가는 주말의 산책. 그런 삶이 아닐까?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의 행복. 그래서 오히려 행복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그러나 본디 그늘이란 뜨거운 햇살이 있어야 생기는 것이 아니던가. 내가 개인적으로 행복하고 편안하다는 것은 어쩌면 바깥세상은 뜨거운 열탕 같은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단지 내가 모르거나 외면하고 있을 뿐. 그래서 더욱더 안도감에 감미로울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만 비겁하면 가늘고 길게 행복할 수 있다고 낄낄대며 소주를 마신다.

초여름의 그늘 같은 삶이 꼭 그렇게 비겁하고 이기적인 삶으로 치부당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든다. 세상이 온갖 풍파로 들끓는다고 꼭 개인적 행복을 포기할 필요도 없고, 그런 삶에 죄의식을 가질 이유도 없다. 오히려 그런 삶을 통해 얻어지는 힘과 용기로 세상에 나가 당당하게 맞서 싸울 수도 있고, 또 어쩌면 김수영의 시처럼 ‘먼저 눕는 풀’이 되어 세월을 견디다가 다시 희망을 도모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삶은 계속되는 거니까.

진짜 초여름의 그늘 같은 삶은 내가 그늘을 만들어주는 삶이다. 세상의 풍파와 상관없이 오랜 나무처럼 우뚝 서서 그늘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 그늘 아래 종달새와 풀벌레들이 모이듯, 사람들이 다가와 안식을 얻고, 혹은 그 아래 앉아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아내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할머니들이 손주들의 재롱을 말없이 웃으며 봐줄 수도 있겠다. 그렇듯 절대 이타적인 삶을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나는 감히 그런 삶을 살지 못했다. 아니, 아예 시도조차 못했다. 삶의 이력서 어디에도 그와 같은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마음가짐은 물론 행동습관 모두가 차가웠다. 그건 분명했다.

얼마 전 부산에서 어느 민간 오케스트라 단원이었던 한 예술가가 아파트 아래로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는 보도를 보았다. 그는 평소 버스비도 아까워 40㎞나 떨어진 공연장까지 무거운 악기를 등에 지고 자전거로 다녔다고 한다. 연주가 없는 날에는 대리기사는 물론 음악학원 강사 생활로 생계를 연명하고자 하였으나 아내와 세 자녀를 부양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그런 고된 삶의 연속, 끝이 보이지 않는 불안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는 결국 극단의 선택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문화행정을 하면서 나름대로 초여름의 그늘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수천만원의 출연료를 주고 유명 아티스트를 초대하여 수준 높은 관객들의 눈높이를 맞추는 것도 소중한 일이겠지만, 가능한 한 지역의 많은 예술가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지역문화 발전이라는 추상적 선언보다 중요한 실질적인 생존 조건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개인으로는 결코 시도조차 못했던 초여름의 그늘과 같은 삶이 되지 않을까, 그런 꿈을 꾸는 유월의 어느 날이다.최현묵 대구문화 예술회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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