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번도 없었던 17세 학도병 눈 앞에서 본 친구 죽음 충격”

  • 권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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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6-24 07:08  |  수정 2017-06-24 07:08  |  발행일 2017-06-24 제1면
[인터뷰] 박덕용 6·25참전유공자회 칠곡지회 사무국장
유공자 평균 87세 병치레 많아
자식들에 부담…처우개선 당부
“군번도 없었던 17세 학도병 눈 앞에서 본 친구 죽음 충격”
23일 칠곡에서 만난 박덕용옹은 “젊은 세대들이 6·25전쟁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고 말했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당시 17세이던 내 눈앞에서 친구가 북한군의 총격에 쓰러지는 걸 목격했습니다. 이게 전쟁이구나라는 충격과 공포가 엄습해와 여러 날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박덕용 6·25참전유공자회 칠곡지회 사무국장(83)은 6·25전쟁 때의 기억을 회상하며 말끝을 흐렸다.

“잘못하다간 북한군에 잡혀가 죽을 판이다 보니 차라리 군에 가서 그들과 싸우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동네 친구 열댓 명과 같이 군에 가게 됐습니다.” 그는 전쟁이 일어나고 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친구들과 더불어 입대했다.

그는 고향인 전북 장수군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11사단에서 지급한 솜바지를 입고 위에는 교복에다 학생모를 쓰고 군번도 없이 전투에 나섰다. 체계적인 훈련도 없었다. 총 쏘는 법이 전부였다. 학도병으로 11사단 13연대 1대대 2중대 수색소대에 배속되어 진격 때마다 가장 앞에 섰다. 적과 마주치는 첨병 역할을 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총알받이였습니다. 작전 때 우리를 항상 맨 앞에 세웠으니까요.”

그는 국군 11사단이 전방으로 투입되기 직전까지 약 1년6개월간 수색대원으로 지리산과 덕유산 곳곳에서 벌어진 여러 전투를 치렀다. 자기 바로 앞에서 북한군의 총격으로 세상을 떠난 친구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메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산 아래 민가에서 마련한 밥을 짊어지고 산을 올라가는 능선 길목에 북한군이 매복을 하고 있었습니다. 북한군 총구와는 불과 1m도 안 됐죠. 탕, 탕, 탕…. 일시에 북한군이 총격을 가하는데 모두가 놀라 5~6m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때 친구 1명이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순간과 장면이 너무 생생해 한동안 힘들고 괴로웠습니다.”

박 사무국장은 수많은 전장을 누비면서 자신은 운 좋게 살아남았다고 했다. 하지만 전쟁은 인간의 생명과 삶 자체를 송두리째 뭉개 버린다며 평화의 소중함을 누누이 강조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조국의 위기 앞에 고귀한 목숨을 바쳐가며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를 꽃피울 수 있도록 한 6·25참전유공자의 처우 개선을 당부했다.

“유공자들의 평균 나이가 87세인데, 많이 살아야 5년 남짓입니다. 다들 병원 갈 일이 많고, 치과 치료나 수술을 하게 되면 큰돈이 필요합니다. 매번 자식들에게 손을 벌릴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가 죽고 나면 22만원인 참전명예수당도 끊깁니다. 당국이 살아 있는 부인들의 생활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도록 수당이라도 지급해줬으면 합니다.”

권혁준기자 hyeokjun@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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