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영의 즐거운 글쓰기] 괴테의 오소리 가죽 배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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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6-26 07:49  |  수정 2017-06-26 07:49  |  발행일 2017-06-26 제18면
[박미영의 즐거운 글쓰기] 괴테의 오소리 가죽 배낭

‘새벽 3시에 칼스바트를 몰래 빠져나왔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이 나를 떠나게 내버려두지 않았을 테니까. 8월28일, 내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려고 했던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아마 나를 잡아두려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여행가방과 오소리 가죽 배낭만을 꾸린 채 홀로 역마차에 몸을 싣고 7시30분 츠보타에 도착했다. 안개가 낀 아름답고 고요한 아침이었다. 위쪽의 구름은 양털처럼 띠무늬를 이루고 있었고 그 아래쪽은 묵직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이 내겐 좋은 징조처럼 보였다. 오늘은 북위 49도 선상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하루가 기분 좋게 시작된다.

정말이지, 지난 몇 년 동안은 마치 병이 든 것 같았고, 그것을 고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이곳을 내 눈으로 직접 바라보며 이곳에서 지내는 것뿐이었다. 이제 와서 고백하건대 그때는 정말 라틴어로 씌어진 책 한 권, 이탈리아 지방의 그림 한 점조차 바라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 나라를 보고자 하는 욕망이 너무나 강렬했다.

나는 현재 어떤 책이나 어떤 그림도 주지 못하는 감각적인 인상에만 사로잡혀 있다. 사실은 세상에 대해 다시 관심을 갖고 나의 관찰력을 시험해보고 있다. 나의 과학적 지식과 일반적 지식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나의 눈이 밝고 맑으며 빛나고 있는지, 재빠르게 훑어보면서 얼마나 많은 대상을 포착할 수 있는지, 그리고 내 감수성에 파고들어 새겨진 인상들이 다시 지워질 수 있는지 검토해보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토록 갈망해 왔던 고독을 이제야 충분히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아무도 모르는 이방인이 되어 군중 속을 헤치고 돌아다닐 때보다 더 진한 고독이 느껴지는 곳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예술이란 삶과 같은 것이다. 즉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점점 더 넓어지는 것이다. 예술이라는 하늘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들이 계속 나타나서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예술도 자연처럼 모든 척도를 초월할 수 있다.

나의 경건한 조상 디오게네스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이 종교적인 세계 정복자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더욱 고귀한 예술과 순수한 인간성의 태양을 제발 가리지 말았으면 합니다.”

나 역시 격렬하게 요동하는 대양에서 항구를 향해 노를 저어가고 있다. 비록 등대의 불빛이 이리저리 위치를 바꾸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불빛을 날카롭게 주시하면 결국에는 해안에 도달할 것이다. 길을 떠날 때는 언제나 과거의 모든 이별과 미래의 마지막 이별이 무의식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법이다.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너무 많은 준비를 한다는 말이 이번에는 더욱 절실하게 마음에 와 닿는다.’ (괴테, ‘이탈리아 기행’ 중에서)

괴테는 유언으로 “내게 좀 더 빛을…”이라고 했답니다. 디오게네스처럼 “더욱 고귀한 예술과 순수한 인간성의 태양을 제발 가리지 말라”는 뜻이었을까요. 괴테는 1786년 9월부터 1년9개월 동안 이탈리아 기행을 떠납니다. 생활에 함몰되어 자신의 상상력이 점점 무뎌진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인간의 게으름이 저나마 용인되던 괴테의 그 시절이 비단 나만 부러운 걸까요.

<시인·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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