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들의 사랑이야기 .19]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유치환과 이영도(下)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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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6-29   |  발행일 2017-06-29 제22면   |  수정 2017-06-29
밤비에 새잎나거든
“영겁의 길 동반할 수 있기를” 流星을 향해 아픈 기원 나누었지만…
20170629
통영의 청마문학관 옆에 있는 청마 유치환 생가. 유치환은 거제의 외가에서 태어나 통영 본가에서 자랐다고 한다.

청마 유치환은 ‘파도’라는 시로 이영도를 향한 사랑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가슴 절절함을 표현한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님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이영도는 유교적인 전통 규범을 깨뜨릴 수 없기에 마음의 빗장을 굳게 걸어 잠그고 유치환의 사랑이 들어설 틈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날마다 배달되는 편지와 사랑의 시편들에 마침내 바위 같이 흔들리지 않던 이영도의 마음도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들의 정신적 사랑은 시작됐으나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기에, 두 사람의 만남은 거북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시 ‘무제 1’은 이영도의 첫 시조집 ‘청저집(靑苧集)’에 실렸던 작품으로, 유치환과의 연정을 한창 싹틔우고 있을 무렵의 심경을 토로한 것이다.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窓)만 바라다가/ 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60세 청마 불의 교통사고로 숨져
정운과의 애틋한 사랑도 막내려

청마가 20여년간 쓴 5천통 戀書
정운이 추려 단행본 서간집으로
두 시인 러브스토리 세간 알려져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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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 유치환(왼쪽)과 정운 이영도.

다음은 유치환이 이영도에게 보낸 시 ‘행복’이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부산여상 교장으로 재직하던 유치환은 60세가 되던 1967년 2월13일 저녁 예총 일로 문인들과 어울렸다가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시내버스에 치여 숨지게 된다. 이로써 이들의 사랑도 끝이 나고, 그들의 러브스토리도 세상에 알려졌다.

20여 년 동안 유치환이 이영도에게 써 보낸 연서는 모두 5천여 통이었다. 사모의 정을 담은 편지를 거의 매일 보낸 셈이다. 이영도는 1967년 그중 200통을 추려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라는 제목의 서간집을 단행본으로 엮었다.

유치환이 별세한 후 이영도는 ‘탑’이란 시를 통해 자신의 애뜻한 마음을 표현했다.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 번 흔들지 못하고/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는 사리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이영도의 시를 하나 더 보자. ‘그리움’이다.

‘생각을 멀리하면/ 잊을 수 있다는데// 고된 살음에/ 잊었는가 하다가도// 가다가/ 월컥 한 가슴/ 밀고 드는 그리움’

이영도와의 사랑은 유치환의 시 세계를 넓혀 주었고, 이영도에게 유치환은 외로움과 고난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받쳐주는 정신적 지주였다. 이들의 사랑은 서로의 시를 시들지 않게 해준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이영도는 통영에서 10여 년간 머물렀고, 1950년대 말에 부산으로 옮겨 와서 1967년 초까지 부산에서 생활했다. 청마가 세상을 떠나자 부산에서 서울로 옮겨 살았고, 1976년 뇌출혈로 삶을 마감했다.

◆아득한 꿈길처럼 기약 없는 그리움

이영도는 1967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유치환이 사망하자 수필 ‘유성(流星)’에서 그 슬픔과 충격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일찍이 나는 사랑하는 이와 더불어 흐르는 별똥을 향해 아픈 기원을 나누어 왔다. 우리들의 목숨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죽어서 멀고도 창창한 영겁의 길을 동반할 수 있기를 빌었던 것이다. 그러나 뜻하지 않는 죽음으로 하여 본의 아닌 배신을 그는 저질렀고, 남은 나는 함께 우러르던 그날의 성좌를 버릇처럼 우러러 섰다. 이제 나는 유성을 두고 어떠한 원력을 세울 것인가.’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죽어서’ 영겁의 길을 동반하길 빌었을 정도로 이영도의 유치환에 대한 사랑이 더했는지도 모른다.

이영도가 별세한 뒤 무남독녀 박진아가 유품을 정리하니, 미리 써둔 유서가 나왔다. 유서에는 딸과 사위, 외손에게 각각 부탁하는 말이 들어 있었다. 거기에는 죽음을 알릴 사람의 이름과 화장해 달라는 말, 그리고 장례비에 써 달라는 상당한 액수의 돈이 함께 들어 있었다. 남에게 신세 지기를 꺼리고 신세를 지면 갚으려고 하는 사람이었기에, 자신의 죽음도 비록 딸이지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다.

이영도는 딸이 급히 쓸 일이 생겨 엄마에게 돈을 빌리고자 하여도 자신의 장례비는 건드리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준비하는 삶을 살았다.

근검절약하며 살았던 이영도는 택시를 타는 일이 거의 없고, 값비싼 음식을 사 먹는 일도 없었다. 물건을 쌌던 포장 노끈까지도 잘 간수했다가 재활용하고 원고지 뒷면의 활용은 물론, 편지를 쓰다가도 틀린 곳은 다시 종이를 덧붙여 썼다. 철 지난 달력의 아름다운 그림들은 잘 손질하여 화장실 부엌 같은 곳에 진열하기도 했다.

이영도는 자신의 유고 시집 서문을 노산 이은상에게 부탁했다. 1976년 8월에 나온 유고 시집 ‘언약’에 이은상이 쓴 서문 일부다.

‘사향노루가 지나간 뒤에는 발자국 닿은 풀끝마다 향기가 끼치듯이, 그는 어디론지 가버렸건만 향내 머금은 작품들이 남아 우리 가슴에 풍기고 있다. 길이 갈 것이다.’

이영도는 청도 출생으로, 한국의 대표적 여류 시조시인이다. 시조시인 이호우의 누이동생으로 1945년 대구의 문예동인지 ‘죽순(竹筍)’에 시 ‘제야(除夜)’를 발표하면서부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시 ‘황혼에 서서’다.

‘산(山)이여, 목메인듯/ 지긋이 숨죽이고// 바다를 굽어보는/ 먼 침묵(沈默)은// 어쩌지 못할 너 목숨의/ 아픈 견딤이랴// 너는 가고/ 애모(愛慕)는 바다처럼 저무는데// 그 달래임 같은/ 물결 소리 내 소리// 세월(歲月)은 덧이 없어도/ 한결같은 나의 정(情)’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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