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엄마의 마음

  • 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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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6-29   |  발행일 2017-06-29 제31면   |  수정 2017-06-29
[영남타워] 엄마의 마음

35년 전, 필자는 고교를 배정받았을 때 적이 실망했었다. ‘뺑뺑이(평준화)’를 통해 정해진 학교는 집에서 걸어서 불과 10분 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잠시나마 어린 마음에…) 학급 수가 적은 ‘소규모 학교’인 게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런 나를 향한 어머니의 일갈(一喝), “호강에 받친 소리 하네, 집에서 가차운 학교가 최고지. 자빠지면 코 대일 곳, 걸어서 댕길 수 있다는 게 어디고.” 자식이 큰길을 건너지 않고 안전하게 등교할 수 있는 학교에 배정받은 것을 크나큰 다행으로 여긴 ‘엄마의 마음’이었으리라.

조선 정조 때 명필가인 김학성의 어머니는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삯바느질로 자식 둘을 키웠다. 비가 내리는 어느 날, 낙수 소리가 유별나게 크게 들려 어머니가 처마 밑 물이 떨어지는 곳을 파 보니 재물이 가득한 솥이 묻혀 있었다. 깜짝 놀란 어머니는 이를 땅에 다시 묻고 돌연 이사를 해버렸다. 훗날 자식들 모두 관직에 오른 뒤에야 어머니는 “재물은 곧 재앙”이라며 보물을 도로 묻고 집을 옮긴 이유를 실토했다. 언론인 고(故) 이규태 선생의 글에 소개된 옛 일화로, 뜻밖의 재물로 자식들이 혹여 면학을 게을리할 것을 경계한 것이다. 숭앙받을 만한 조선시대판(版) ‘엄마의 마음’이라 하겠다.

과거 김대중정부 때 장대환 총리 후보자가 인사청문회에서 ‘자녀 위장전입’을 추궁받자 “맹모삼천(孟母三遷)의 마음으로 이해해 달라”고 대답했다가 혼쭐이 났다. 당시 야당은 “‘맹모 마음’ 운운은 맹자 어머니에 대한 모독"이라고 쏘아붙였다.

맹모는 맨 처음 공동묘지 주변에 살던 중 맹자가 장례 치르는 흉내만 내기에 시장 가까이로 이사를 결행했다. 그러자 이젠 맹자가 장사 흉내를 내는 바람에 결국 서당 가까이로 세 번 집을 옮겼더니 책을 손에 들더라는 것이다. 장 후보자는 이런 고금의 교육철학인 ‘맹모삼천’을 방패 삼아 위장전입을 합리화하려 했기에 된통 비난을 받았다. 존경의 대상인 ‘맹모(엄마)의 마음’을 ‘위장전입의 흑심(黑心)’으로 전락시킨 꼴이다. 그는 이 설화(舌禍)로 결국 낙마했다.

고위 공직자들의 ‘위장전입’ 작태는 문재인정부에서도 어김없다. 특히 최근 임명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청문회에서 장녀 위장전입에 대해 사과하면서 “‘엄마의 마음’으로 했다”고 이해를 구했다. 앞선 ‘맹모의 마음’ 장 후보자와 판박이다. 자기 자녀의 안녕(安寧)만을 위해 실제 거주하지 않을 곳에 몰래 주소를 옮기는 불법행위를 ‘엄마의 마음’으로 치환해버리다니…. 참으로 이기적이고 옹색한 변명이다. “이유 불문하고 잘못했다”고 말하는 게 옳다.

대한민국 대다수의 학부모에게 위장전입은 여전히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한 번 ‘양심의 가책’만 감수하면 아이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해본다. 그럼에도 주민등록법을 어기면 무슨 큰일이라도 날까봐 이내 생각을 바로 돌려 놓는다. 이것이 대한민국 ‘보통 엄마 아빠’의 마음이다. 반면, 정보와 인맥, 권력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에겐 그저 간단한 민원에 불과할 수 있다. 어쩌면 그들 가운데 일부는 별다른 죄의식도 없이 말 한마디·전화 한 통화로 위장전입을 해결할 수도 있다.

한 나라의 장관이 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국민의 보편적 눈높이에도 못미치는, 중대한 도덕적 흠결을 지녔다면 아예 장관 할 생각조차 말아야 한다. 업무 역량(능력)은 다음 문제다. 청문회에서 적당히 변명하고, 임명될 때까지 버티는 짓거리를 더는 지켜보기 힘들다. 차라리 사과라도 제대로 하라. 강 장관은 위장전입을 ‘엄마의 마음’으로 호도(糊塗)한 것에 대해 진정성 있는 사과를 뒤늦게라도 다시 해야 한다. 어물쩍 포장된 ‘엄마의 마음’에 상처받은 대다수 엄마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보듬는 길이다.

이창호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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