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내 이름을 불러주세요

  • 김수영
  • |
  • 입력 2017-07-13   |  발행일 2017-07-13 제31면   |  수정 2017-09-05
20170713
김수영 주말섹션부장

나도 정확히 모르겠다. 우리 집에서 나의 이름이 언제부터 사라져 버렸는지. ‘김수영’이란 이름 석 자가 버젓이 있는데도 어느 순간 내 이름을 찾기 힘들어졌다. 그 자리를 ‘애미야’ ‘○○엄마’ ‘당신’ 등이 차지했다. 어느 날 문득 왜 이렇게 됐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 역시 내 친구의 이름을 부를때 이런 식이다. 그나마 결혼 전에 만난 친구는 그 친구의 이름을 부르는데 결혼 후 만난 친구, 특히 아이를 낳고 난 뒤 만난 친구는 대부분 아이의 이름을 따서 ○○엄마라 부른다. 20년 가까이 만난 친구도 있는데 아직까지 나는 그 친구의 이름을 모른다. 그 친구의 아이 이름은 기억하면서.

결혼과 동시에 부모가 준 나만의 소중한 이름 석 자는 자취를 감춰버리고 애미, ○○엄마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가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런 이름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나만이 가진 이름, 그리고 20~30년간 나를 증명해준 이름이 어느 날 사라져 버리면서 나는 가끔 정체성에 혼란을 겪곤 했다.

이름은 사람에게 정체성을 부여해주는 중요한 요소다. 내 이름 역시 한자를 풀이해 보면 ‘몸과 마음을 잘 닦아서 뛰어난 인물이 되라’는 함축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 이름이 결혼 후 애미, ○○엄마로 불리게 된 것은 나 자신의 삶보다는 가정, 가족에 관심을 기울이고 더 큰 힘을 쏟으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사람에게 이름은 정체성을 부여해주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이름에 따른 행동을 할 수 있다. 이름 뒤에 ‘선생’ 단어를 붙이면 자기도 모르게 선생처럼 행동하게 된다는 식이다. 아이가 어릴 때 부모가 ‘너는 커서 의사나 교수가 되라’는 바람을 붙여 일부러 ‘김 원장, 김 교수’ 하며 부르던 것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만큼 이름이 중요하단 의미다.

가정에서 이름을 잃어버린 나는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당하곤 한다. 사람들이 나를 표현할때 흔히 ‘여(女)기자’란 말을 붙인다. 그런데 남자기자에게는 ‘남(男)기자’란 말을 쓰지 않는다. 몇 년 전 대구경북기자협회장을 맡았을 때 상당수 사람이 ‘여기자협회’의 회장이라고 소개하는 것을 봤다. 기자는 보통 남자라는 생각에서 여자가 기자협회 회장을 하고 있으니 무의식 중에 여기자협회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물론 이런 예는 기자만이 아니다. 의사, 교수 등의 직업명 앞에도 ‘남’자는 붙지 않는데 ‘여’자는 흔히 따라붙는다. 여의사, 여교수라고. 기자, 의사, 교수라는 직업명은 이론적으로 남녀 모두를 아우르는 표현이지만 우리의 언어습관은 ‘여’자라는 접두사를 붙여서 묘한 의미를 더한다. 아마 이는 남자와 여자라는 생물학적 차이와 우리 인식에 자리한 남녀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복합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라 생각된다.

7월은 양성평등주간(1~7일)이 있는 달이다. 국가를 넘어서 전세계적으로 양성평등이 이뤄져야겠지만 이를 위해서는 집안에서부터 작은 변화를 꾀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2007년 대통령선거 때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가 한 TV토론회에서 내놓았던 이색제안이 생각난다. ‘아내의 이름부르기운동’을 제안하면서 “이것이 양성평등의 시작”이라고 한 것이다. 그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부터라도 각 가정에서 시도해 보기를 바란다. 물론 ‘여보’ ‘당신’이라고 부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때로는 아내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아내에게는 새로운 자극이 되고 자긍심을 심어주는 작은 실천이 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새 정부가 지난 10일 대통령 직속 성평등위원회를 설치해 성평등 관련 정책을 총괄, 조정하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실질적 성평등 사회 실현을 국정과제로 채택하고 성평등위원회를 설치해 중앙부처와 지방정부에 성평등정책 전담 인력 배치 등을 할 계획이란다. 새 정부의 이런 정책이 좀 더 실질적 효과를 내어 우리 사회에서 양성평등문화가 하루빨리 정착되기를 기대해 본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