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협주와 협치

  • 박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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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7-18   |  발행일 2017-07-18 제31면   |  수정 2017-07-18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는 나의 애청곡이다. 아마 1천 번 이상 듣지 않았나 싶다. 천 번의 벽을 넘은 또 다른 곡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의 경우 2악장만 반복해서 듣는 데 비해 ‘황제’는 1·2·3악장 다 듣는 게 차이점이다. 그만큼 전 악장이 다 좋다는 얘기다. ‘황제’는 사람으로 치면 팔방미인이다. 협주곡이지만 소나타의 단아함과 정갈함이 녹아 있고 교향곡이 뿜어내는 장엄함까지 겸비했다. 재료는 같아도 셰프에 따라 다른 음식이 나오듯 ‘황제’도 연주 조합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황제’에 관한 한 크리스티안 짐머만, 레너드 번스타인, 비엔나 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찰떡 케미를 능가할 궁합은 없을 것이다. 나도 항상 이들의 연주만 듣는다. 짐머만은 1975년 쇼팽 피아노 콩쿠르 우승자로, 2015년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조성진을 극찬한 인물이다. 1990년 작고한 미국 지휘자 번스타인은 생전 카라얀과 쌍벽을 이뤘다. “구대륙에 카라얀이 있다면 신대륙엔 번스타인이 있다”는 말이 그의 기량과 위상을 웅변한다.

협주다운 협주가 등장한 건 바로크 시대다. 그 전까지는 독주이거나 음색·음량이 비슷한 악기끼리의 협연이 고작이었다. 협주와 피아노의 등장은 중세 음악 생태계를 훨씬 다채롭고 풍요하게 만들었다. 협주는 음색과 음량이 전혀 다른 악기들이 협력하고 경쟁하는 구도다. 상대를 배려하면서도 자기 기량을 발휘해야 한다. 호흡을 맞춰야 하니 너무 튈 수도 없다. 협주곡이 까다롭고 어려운 이유다. 하지만 협주는 독주가 감히 넘보지 못하는 영역의 소리를 빚어낸다. 협주의 묘미다.

협치도 협주와 다르지 않다. 문재인정부 출범과 함께 우리의 협치는 시험대에 올랐다. 120석의 집권여당, 다당제의 정치구도에서 국정 추동력을 확보하는 길은 협치뿐이다. 하지만 협치엔 배려와 양보라는 솔루션이 필요하다. 지난주 꽉 막힌 정국의 실타래를 푼 동인(動因)도 배려와 양보였다.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국민의당을 찾아 사과한 건 배려였고, 조대엽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를 낙마시킨 건 양보였다. 송영무 후보자를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하면서 자기 기량도 발휘했으니 협주의 정석(定石)을 보인 셈이다. 여야의 찰떡 공조로 협치 시대를 활짝 열기 바란다.

박규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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