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오래된 서점에서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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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7-20   |  발행일 2017-07-20 제30면   |  수정 2017-09-05
북카페·헌책방 돌아보니
갈래머리 시절 향수 가득
읽었으나 다시 읽고 싶은
빛바랜 책 몇권 싸게 사서
서점 나서는 두팔이 묵직
20170720
허창옥 수필가

낯선 공간으로 들어선다. 커피향이 자우룩한 실내에는 쇼팽의 ‘녹턴’이 흐르고 있다. 아래층, 위층 벽면이 책으로 꽉 찼다. 온통 책 천지다. 커피냄새, 책 냄새와 음악이 어우러진 북 카페다.

수십 년 전에 근처의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때는 여기가 꿈의 장소였다. 용돈을 따로 받는 시절이 아니었으므로 읽고 싶은 책을 따로 살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돈이란 ‘어쩌다가’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어느 해 추석날 친구와 대도극장에서 영화를 보기로 했다. 그런데 ‘연소자 관람불가’였다. 그 돈으로 이 골목의 서점들을 돌아다녔다. 그때는 헌책방이 아니었다. ‘데미안’을 샀다. 갖고 싶었던 책이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얼마나 멋진 말이었던가.

‘책을 살 수 있구나’는 새로운 발견이었다. 그 어쩌다가 생긴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서 한 권씩 한 권씩 책을 샀다. 앙드레 지드 전집이 되었고, 헤르만 헤세 전집이 되었다. 책에 매몰되었다. 제롬에, 싱클레어에, 히스클리프에 반했다. 요즘 청소년들이 시집 한 권, 단편소설 한 편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없는 걸 생각하면 무척 안타깝다. 지금의 청소년들은 늘 시간에 쫓기고 있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를 말하는 것이지만 교육제도가, 목표치가 그들을 옥죄고 있는 게 현실이다. 지식도 정보도 심지어 정서까지도 디지털에서 얻는다. 꽃 이름, 개화기, 자생지도 휴대폰이 가르쳐주고 만화도 컴퓨터로 읽는다.

훌륭했던 옛 서점들이 퇴락한 간판을 걸고 몇 군데에서 명맥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소중한 장소로 오래오래 그 자리를 지켰으면 한다. 종이책이 사라진다는 말이 있다. 아니다. 책은, 종이책은 영원하다. 책은 인간의 정신이 낳은 가장 위대한 산물이다. 책은 인공지능이 지배하려는 세상에서 인류가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보물이고 보루다.

서점에 대한 향수는 언제나 가슴속에 머물러 있었다. 불현듯 그 옛날의 서점이 떠올랐다. 순간 그리움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내 갈래머리 시절 대도극장, 대한극장이 마주하고 있던 곳, 거기에 서점들이 있었다. 오가며 더러 본 적은 있었다. 대형서점과 인터넷서점에 밀려 없어지고, 좁아지고, 쇠락해갔다. ‘내 놀던 옛 동산’과 ‘인걸은 간 곳 없네’에 버금할 만한 상실감이라고 하면 과장이라 할 것인가.

북 카페를 일별하고 나와서 좁은 골목으로 접어드니 길을 향해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있다. 수호지가 다섯 권 차례대로 쌓여있어서 들추어보니 1976년에 간행된 것이다. 종이는 누렇게 변해 있었고 활자도 이제 내 눈으로는 읽을 수 없을 만큼 작다. 바로 옆 서점에서 두 남자가 바둑을 두고 있다. 딱, 딱, 바둑알 놓는 소리가 골목 안의 정적을 깬다. “천천히 볼 거니까 그냥 바둑 두세요.” 좁은 서점 안을 살폈다. 탐나는 책이 많았다. 염상섭의 ‘삼대’, 이인직의 ‘혈의 누’, 토마스 하디의 ‘테스’ 등 다섯 권을 골랐다. 한 권 값이다. 읽었으나 다시 읽고 싶은 것, 소장하고 싶은 것을 들고 몇 군데 더 돌았다. 오래된 전집들, 문예지들, 학생용 참고서들이 즐비했다.

다시 북 카페로 돌아온다. 아래층을 살피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벽면에 빽빽한 책들을 유심히 살핀다. 책들은 묶인 채로 쌓여있고, 시리즈끼리 조르륵 꽂혀 있다. 서가에 나란히 꽂힌 책등이 만들어내는 무늬는 비단결보다 더 아름답다. 이문구의 ‘우리 동네’, 이병주의 ‘타인의 숲’,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버진 블루’ 등 여섯 권을 뽑아들었다. 역시 한 권 값이다. 횡재했다는 기분이 든다. 계산대 옆에 소혜왕후의 ‘내훈’이 놓여있다. 낡아서 바스라질 것 같다. 함께 넣은 뒤 자리에 앉는다.

커피는 향으로만 즐기기로 하고 고구마라테를 시킨다. 달고 시원하다. 서점을 나선다. 비닐봉지가 양팔에서 묵직하다.


이창호 leec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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