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미의 브랜드스토리] 캘빈 클라인

  • 김수영
  • |
  • 입력 2017-07-21   |  발행일 2017-07-21 제40면   |  수정 2017-09-05
젊음과 性的 매력을 동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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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빈 클라인의 2017 FW 컬렉션 작품.

여름의 뜨거운 날씨만큼이나 화끈한 광고로 시선을 끄는 브랜드가 있다. 그 브랜드는 바로 미국의 패션디자이너 캘빈 클라인이 창립한 브랜드 ‘캘빈 클라인(Calvin Klein)’이다. 현대 여성을 위한 클래식하며 실용적인 아메리칸 스타일을 선보이며 깔끔한 재단과 블랙 앤 화이트, 뉴트럴 컬러에 기초한 모던하고 세련된 스타일을 보여줬다.

캘빈 클라인은 누드와 과감한 성적 표현을 담은 광고 이미지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도 그만의 아우라를 구축하며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섹슈얼한 이미지를 앞세운 노이즈 마케팅을 통해 브랜드 홍보는 물론 매출 상승도 이어갔으며 이것으로 창립자 캘빈 클라인은 시대를 앞서가는 마케팅 천재로 인정받았다.


순수·단순·깨끗·모던함이 미적 근간
클래식하며 실용적인 아메리칸 스타일
1978년 시작한 청바지 사업으로 명성

15세 브룩 쉴즈의 청바지 모델 기용 등
섹시하고 자극적인 광고로 숱한 화제
男 속옷 허리밴드에 로고 새겨 큰 인기


창립자 캘빈 클라인은 1942년 미국 뉴욕 브롱크스에서 태어났다. 패션에 관심이 많았던 어머니와 숙련된 재봉사 출신의 할머니에게 바느질을 배우며 패션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갔고, 그림에 소질이 있던 그는 미술고등학교 졸업 후 뉴욕의 FIT에 진학해 패션공부를 했다.

1963년 FIT를 졸업한 캘빈 클라인은 뉴욕 7번가의 의류 제조업자 밑에서 일을 배우며 패션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당시 뉴욕의 패션은 몇몇 디자이너브랜드를 제외하고는 파리 패션에 의존한 컬렉션 일색이었는데, 그림 실력이 뛰어났던 그는 파리 오트쿠튀르 컬렉션을 카피해 스케치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이를 통해 그는 파리 패션의 노하우를 익힐 수 있었다. 그러나 무명의 카피디자이너로서의 삶에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자신의 컬렉션을 만들고자 하는 꿈을 키워나갔고, 1968년 오랜 친구이자 사업 파트너인 배리 슈워츠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자신의 브랜드를 설립했다.

캘빈 클라인 브랜드를 통해 전문직 여성을 위한 캐주얼하면서도 우아한 클래식 의상들을 선보이기 시작한 그는 1968년 뉴욕 7번가의 한 호텔에서 작은 쇼룸을 열었는데, 이곳에서 일생일대의 기회를 얻었다. 당시 본위트 텔러 백화점의 상품 매니저였던 돈 오브라이언은 실수로 엘리베이터 층을 잘못 내려 그의 쇼룸에 걸려 있던 코트들을 보게 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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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룩 쉴즈 광고

캘빈 클라인의 재능을 알아본 그는 당시 패션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밀트레드 커스틴 사장과의 미팅을 주선하며 그에게 성공의 기회를 주었다. 캘빈 클라인의 컬렉션을 인상 깊게 본 커스틴 사장은 그 자리에서 5만달러의 주문을 제안했고, 이를 계기로 그의 쇼룸은 바이어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어 본위트 텔러 백화점의 도움으로 백화점 쇼윈도에 그의 컬렉션이 전시되고, 뉴욕타임스에 광고가 게재되는 등 그는 서서히 아메리칸 스타일을 대변하는 디자이너로 각광받았다.

캘빈 클라인은 클래식한 아메리칸 스포츠웨어를 보다 젊고 현대적인 디자이너 패션으로 변신시키는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심플하면서도 세련된 그의 의상은 여성의 사회활동이 활발해진 1970년대 젊은 여성의 커리어 의상으로 사랑받았다. 1973년 코티상을 받은 그는 명실공히 미국 대표 패션디자이너로 인정받았다.

순수함, 단순함, 깨끗함, 모던함 등은 캘빈 클라인의 미적 근간으로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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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자 캘빈 클라인

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러한 그만의 스타일로 타임지를 비롯한 여러 매거진의 주목을 받았다. 1970~80년대를 거치며 캘빈 클라인은 액세서리, 디자이너 진, 향수, 코스메틱, 언더웨어, 시계 등으로 상품 영역을 확장했고, 1978년 시작한 청바지 사업이 성공하면서 그는 미국의 대표 디자이너에서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발돋움했다.

캘빈 클라인은 자신의 브랜드를 알리기 위해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섹슈얼한 광고 이미지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그중에서도 가장 화제를 모은 것은 바로 ‘캘빈 클라인 진(Calvin Klein Jean)’의 첫 광고다. 당시 15세이던 브룩 쉴즈가 등장해 “나와 캘빈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나요? 아무것도 없어요”라는 당돌한 멘트로 엄청난 반응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광고로 사람들 입에 연일 오르내리며 브랜드의 홍보 효과와 함께 매출 수직 상승이라는 결과를 얻은 캘빈 클라인은 계속해서 표현의 금기에 도전하며 논쟁을 일으키는 노이즈 마케팅을 펼쳐나가며 유행에 민감한 젊은 세대에게 높은 지지를 얻었다.

이후 1982년 남성 속옷의 허리 밴드에 브랜드 이름을 새겨 넣은 캘빈 클라인 언더웨어 라인을 발표하고, 1983년 남성 속옷과 같은 플라이 오프닝(fly opening, 앞가림천)이 부착된 여성용 속옷을 제안하며 기존의 인식과는 다른, 패션아이템으로서의 언더웨어를 내놔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80년대 후반, 결혼과 가족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분위기 변화는 그의 비즈니스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이성에게 어필하는 섹슈얼한 감각은 가족과 헌신적인 사랑이라는 주제로 바뀌었고, 향수 ‘이터니티’의 출시로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이런 가운데 1990년대 초 캘빈 클라인은 매출 부진으로 인한 심각한 재정적 위기를 맞았다. 이를 이겨내기 위해 새로운 제품 라인이 기획됐고, 1993년 X세대를 겨냥한 새로운 ‘ck 컬렉션’을 선보였다.

1990년대 캘빈 클라인의 시그니처 모델로 발탁된 케이트 모스는 평범하지만 개성있는 이웃집 소녀를 연상시키며 캘빈 클라인의 새로운 전성기를 이끌었다. 젊고 건강한 이미지로의 변화는 ck 컬렉션의 성공으로 이어졌고, 1994년 남녀 공용 향수로 출시된 ‘ck One’ 또한 큰 인기를 끌었다. 캘빈 클라인은 1995년 뉴욕 메디슨가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오픈하고 1997년 사상 최고의 실적을 올렸다.

그러나 이런 재도약에도 불구하고 각종 라이선스 사업과 확대된 글로벌 비즈니스로 몸집이 커진 사업체를 감당하기는 쉽지 않았다. 1990년대 말 ‘캘빈 클라인 진’을 제조·판매하는 와나코 그룹과 법정 공방을 벌이며 위기를 맞았고, 캘빈 클라인은 캘빈 클라인 회사를 매각 결정하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현재의 캘빈 클라인은 여러 명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에 의해 전개되고 있으며, 그가 남긴 미니멀리즘의 단순성과 순수성, 미국적 실용주의 정신을 지켜나가며 새롭게 재창조되고 있다. 프리밸런스·메지스 수석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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