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대구화교교회 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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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7-25   |  발행일 2017-07-25 제29면   |  수정 2017-07-25
[기고] 대구화교교회 60년

25일 대구시 중구 수동에 위치한 대구중화기독교회가 설립 60주년 기념회를 개최한다. 이 교회는 1957년 7월 대구지역의 중국인(화교)을 위해 화교와 지역 교회의 도움으로 삼덕동의 작은 공간에 정식 설립되었다.

한국의 화교교회는 서울(1912), 인천(1917), 부산(1929)에 각각 설립되었기 때문에 대구교회의 설립은 늦은 감이 없지 않다. 대구에 화교가 정착한 것은 1905년이기 때문에 약 50년 뒤에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늦게 세워진 것은 지역의 화교인구가 이들 지역에 비해 적고 경제력도 상대적으로 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6·25전쟁 때 서울과 인천의 많은 화교가 대구에 피란 오면서 지역화교의 인구는 역대 최고인 3천명을 넘어섰으며 화교경제도 상업과 중화요리점을 중심으로 큰 발전을 이루게 된다.

부산화교교회의 선교활동과 대구 삼덕교회의 초대 목사인 홍대위 목사의 노력으로 1957년 6월 말부터 동 교회에서 화교를 위한 주일 예배가 시작되었다. 홍 목사는 중국 신의신학교(信義神學校)를 졸업하고 중국인 교회에서 사목을 한 후 칭다오의 신의여자신학교의 교수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그는 5년간 중국어로 목회활동을 한 후 물러나고, 1962년 9월 화교 딩신(丁信)이 2대 목사로 취임했다. 딩신은 광복 직후 인천화교협회에서 대외업무를 총괄하는 직원으로 일하다 6·25전쟁을 계기로 대만에서 신학공부를 한 후 목사가 된 인물이다. 그는 1974년 12월 서울의 화교교회로 옮기기까지 12년간 부인 장춘잉(蔣春英)과 교회의 초석을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화교 신자 증가로 기존의 예배당으로 수용이 불가능하자, 그는 교인의 헌금과 각지의 기부로 1967~68년 495㎡(150평)의 부지에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했다.

대구교회는 1970년대 주일학교 학생만 50여명에 달하고 전체 교인이 100명을 넘을 정도로 큰 성장을 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화교경제의 침체와 한국정부의 각종 차별정책으로 지역의 화교가 미국, 대만 등지로 이주하면서 교인 수가 점차 감소했다.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 익생춘 한약방의 양춘샹(楊春祥) 장로를 비롯한 교인의 노력으로 교회를 유지해왔다.

화교 장루후이(臧汝蕙) 전도사가 2013년 부임한 후 한국인 신자의 입회가 늘어나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대구화교교회를 다닌 교인은 한국뿐 아니라 대만, 미국, 캐나다 등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다. 그들은 대구를, 대구교회를 늘 그리워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산(離散)의 공동체이다. 화교교회가 어려운 처지에 있는 만큼 지역민의 관심과 사랑이 더행 필요한 때이다. 이정희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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