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밥하는 아줌마

  • 이창호
  • |
  • 입력 2017-07-27   |  발행일 2017-07-27 제30면   |  수정 2017-09-05
밥을 하는 여성 노동자는
동네의 아줌마가 아니라
정식 기술자로 인식돼야
그것이 개개인의 노동을
존중하는 올바른 사회다
20170727
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는 말을 남기고 2008년 우리 곁을 떠난 ‘토지’의 작가 박경리. 그가 하늘로 돌아간 후 2주기였던가, 작가를 기리는 TV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한평생 한(恨)으로 남은 외동딸 김영주와 사위 김지하, 작가가 딸처럼 아꼈다는 박완서를 비롯한 많은 후배 문인, 작가의 진주여고 동창, 고향인 통영 사람들까지 박경리를 추억하는 많은 이들 가운데 원주 토지문화관 인근 작가가 즐겨 찾았다는 단골식당 주인 부부의 인터뷰가 가장 인상 깊었다. 30대 초반의 젊은 부부는 박경리를 추억하다 몇 마디 못하고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선한 눈빛의 식당 안주인이 울음을 꾹꾹 눌러 삼키며 들려준 작가의 모습은 이랬다.

“아가! 너는 잘살 거다. 네 자식도 잘살 거다. 옛날 부산에 공무원집 아이와 식당 하는 집 아이가 있었는데 참 신기하게도 공무원의 아이보다 장사하는 집 아이가 성공했단다.”

모르긴 해도 작가는 다른 이를 위해 정성으로 밥 먹이는 일, ‘남을 섬기는 일’이 복 짓는 일이란 걸 말해주고 싶어 젊은 부부에게 이렇게 덕담을 했나 보다. 젊은 새댁은 그 말이 그렇게 가슴에 남아 큰 위안이 됐다며 울먹였다.

박경리는 토지문화관에 들어와 밤을 새워 고뇌 어린 창작 작업을 하는 젊은 작가와 예술가들을 위해 아침저녁으로 손수 반찬을 한두 가지씩 만들어서 식당으로 내려 보내주었다고 한다. 토지문화관에 한 번씩 다녀갔던 사람들은 대작가가 만든 그 귀한 반찬을 ‘선생님표 밥’이라 불렀다고 한다. 매일 반찬을 준비하면서도 행여 부담을 줄까봐 얼굴도 비치지 않았고, 혹여 마주치더라도 “한 줄도 못 써도 괜찮다. 밥 많이 먹었냐?”라는 말만 했다는 박경리. ‘밥 먹이는 일’의 가치와 섬김의 의미를 되새겨 주는 일화들이다.

얼마 전 비정규직 급식노동자를 ‘밥하는 아줌마’라고 지칭한 여성 국회의원이 여론의 질타를 당했다. “밥하는 아줌마가 왜 정규직이 되어야 하냐? 그냥 동네 아줌마들이다. 그냥 조금만 교육시키면 된다.” 이 발언을 접하고 며칠 동안 잠이 오지 않았다. 원색적이고 우월의식에 가득 찬 발언내용에 처음엔 분노가 일었다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저런 발언을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기도 했다. 서울대 출신, 사법시험 패스, 변호사, 30대에 국회의원 당선, 재선 국회의원이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지닌 한마디로 유리천장을 뚫은 성공한 여성 정치인이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반드시 젠더의식 여부를 결정짓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어렵게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들에게 여성권리 향상과 소수자 인권의식을 기대했다가 실망했던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 주위엔 여성이지만 자신이 이룬 성과에 만족하면서 남성중심적 가치와 사회적 관행을 그대로 내면화하는 ‘명예 남성들’이 차고 넘친다.

한국사회는 서구에 비해 유독 비정규직 차별이 심하고 노동시장도 성별로 구분되어 있다. 동일노동을 하더라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처우는 하늘과 땅이고, 성별 임금격차도 OECD 최고 수준이다. 중년 여성들이 돈을 벌기 위해 진입할 수 있는 곳이 음식, 판매, 숙박업 등 비정규직 서비스 업종밖에 없는 사회적 구조에 대한 인식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런 이야기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노동에 귀천이 없고 성별 구분이 없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별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국민을 대표해 세비를 받아가는 국회의원의 사명이다.

‘밥하는 아줌마’는 귀하다. 더구나 ‘밥하는 노동자’는 동네 아줌마가 아니라 정식 기술자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것이 개개인의 신성한 노동이 존중받는 올바른 사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도 해당의원의 SNS에는 ‘엄마의 마음으로 야무진 정치, 따뜻한 정치’라는 프로필이 올려져 있다. 엄마의 마음으로 정치를 하겠다면 아이들의 급식을 책임지는, 그 밥을 만드는 노동자에 대한 인간적 예의부터 갖추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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