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4부> 6. 가족초청 美이민 허인희·백복련 씨 부부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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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8-08   |  발행일 2017-08-08 제6면   |  수정 2022-05-18 17:29
“가족만 믿고 비행기에 올라…한국사람 많아 영어 못해도 돼요”
50대 목전에 갑작스레 실직
여동생 초청으로 시애틀行
일자리 못구해 하와이 재이주
20170808
허인희·백복련씨 부부는 50대가 가까이 돼서야 가족초청으로 미국땅에 발을 들였다. 부부는 이민 3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짙은 경상도 방언을 구사했다. 중앙은 허인희씨 가족 첫 여권 사진.


“자꾸 친구들이 옆에서 미국 못 가게 하는데 그래도 우얍니꺼. 가족이 가는데 안 갈 수가 있습니꺼.” 먼저 미국에 가 있던 여동생의 초청으로 이민을 결심했다. 1960~80년대 가족초청으로 미국에 건너간 많은 이들이 그랬듯 사전에 이민을 준비할 여력은 없었다. 미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할 줄 아는 영어라곤 ‘헬로’ ‘땡큐’ ‘쏘리’가 전부였다. 순전히 가족들에만 의지한 채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에 도착해서는 언어장벽으로 인해 ‘미국 속 작은 한국’만 찾아다녔다. 그러다 보니 영어를 배울 일이 없어 지금도 영어와는 거리가 멀다. ‘대구·경북 디아스포라-눈물을 희망으로’ 미국 서부편 6화는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간 한 대구·경북 가족의 이야기다.
◆대구에서 연을 맺은 부부

허인희씨(79). 대구가 고향인 아버지는 어머니와 일본으로 건너가 고물장사를 했다. 당시 함께 일하던 일꾼이 20여 명에 달할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다. 허씨는 일본에서 8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허씨 부친은 광복 후 직원들을 모조리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허씨가 8세 되던 해였다. 노름을 즐기느라 힘들게 번 돈을 다 날려버린 아버지는 1959년 허씨가 해병대를 제대한 이후 돌아가셨다. 허씨는 대구 중구의 한 주물공장에 다니며 선친의 빈 자리를 메웠다.

김천 성내동 출신의 아내 백복련씨(78)와는 그 무렵 만났다. 백씨는 딸 넷 있는 집의 셋째딸이었다. 19세 되던 해 동네 아주머니의 추천으로 대구 서구 비산동 한 가정집에서 베 짜는 일을 시작했다.

“베틀이 한 10대 정도 될끼라예. 참말로 베 많이 짰구마. 그때만 해도 김천은 촌이지예. 그래도 나는 대구 와서 안 돌아댕기고 공장에서 일만 했어예.”

백씨가 25세 되던 해 지인의 소개로 만난 두 사람은 3년가량 연애 후 결혼했다. 신혼방은 대구시 북구에 차렸다. 아들 하나를 낳고 결혼식을 올린 뒤 아들 둘을 더 낳았다.

그 사이 허씨는 영남주물공장에 취직했다. “월급을 3개월씩 밀려서 받았거든예. 조금씩 가불해서 쓰다 보면 정작 월급날 받을 돈이 없었어예.” 주물공장 다니는 남편과 베 짜는 아내. 이들은 결혼한 지 20여 년이 지난 1987년 9월18일 세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그날은 허씨의 49번째 양력 생일이었다.

◆이민가방 10개…“최대한 많이 싸!”

1980년대 중반. 50대를 목전에 두고 있던 허씨는 갑작스레 직장을 잃었다. 이 소식을 들은 여동생은 허씨네 가족을 미국으로 초청했다. 주한미군과 결혼한 여동생은 미국 시애틀에서 살고 있었다. 당시 세 아들 중 첫째는 막 20대에 접어들었고 둘째는 17세, 막내는 15세였다.

백씨의 지인들은 “미국 가지 마레이. 거기는 한국사람도 없고 아저씨도 못 만난다”며 만류했다.

“자꾸 나를 못 가게 하는 거라예. 그래도 가족들이 가는데 안 갈 수가 있나 카면서 왔지예.”

첫 해외여행이자 첫 이민. 다섯 가족의 머릿속엔 ‘짐을 최대한 많이 싸야 된다’는 생각으로 꽉찼다. 한 사람당 가방 두 개까지 가지고 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이민가방 10개를 구했다. 그 중 한 가방엔 라면만 잔뜩 넣었다.

“해외여행을 가 본 적도 없고 아무것도 몰랐지예. 미국 가면 먹을 게 없다고 해서 라면만 몇 박스를 샀는지 몰라예. 하와이에서 가방 검사하는데 조사원이 라면 보고 웃더라니까.”

김포공항에서 일본, 미국 하와이를 거쳐 LA, 시애틀로 가는 일정. 처음 오른 미국행 여정은 시작부터 고됐다. 힘들게 미국에 왔지만 그곳에서도 일자리를 구하는 건 쉽지 않았다.

“미국에 와서 취직을 하려는데 마음처럼 안 되더라고요. 사과 따러 며칠 동안 워싱턴까지 갔다가 돈은 못 벌고 길 위에서 고생만 하고 오기도 했어예.”

시애틀에 도착한 지 약 두 달. 계속 일자리를 못 구해 헤매던 허씨 가족은 하와이에 살고 있던 또 다른 여동생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하와이로 다시 이주했다. 그곳에서 허씨는 간장 공장, 호텔, 샌드위치 공장, 술집 등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백씨는 한 한인식당의 주방보조 자리를 구했고 그 식당에서만 약 20년간 일했다. 평일과 주말 가리지 않고 일손이 필요하다면 일하러 갔다. 일흔이 돼서야 일을 그만뒀다.

◆“영어 몰라도 상관없어예”

“영어라 카는 거는 지금까지도 일절 몰라예.” 부부 중 특히 백씨는 지금까지도 지극히 한국적인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한인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파마를 할 때는 한인이 운영하는 미용실을 찾는다. 그 때문인지 백씨의 머리스타일은 여느 한국 노년 여성들과 비슷하다. 병원 진료를 받을 때도 병원 내 한국어 통역관을 찾아 도움을 요청한다. 현재 거주하는 노인아파트에는 한국인 세대가 일부 있어 그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다. 이 때문에 하루 중 영어를 사용할 일은 거의 없다.

“여기는예, 한국사람이 많아서 영어 몬해도 됩니더. 쪼매 답답할 때도 있는데예, 그래도 어딜 가든 한국어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살 만해예.”

막막한 미국생활에 가족은 든든한 힘이 됐다. 세 아들은 객지에서 힘들게 돈 버는 부모를 열심히 도왔다.

“우리 애들이 미국 와서 고생 많이 했어예. 주말 아침에 채소 팔러 나간다고 하면 셋 다 그거 도와주겠다고 나서고, 막내는 남의 식당 가서 불판 닦고…. 부모 힘들다고 애들이 일을 계속 해서 그런가 친구들보다 영어를 못 한다 아입니꺼. 힘들 때는 10달러만 달라는 것도 못 줘가지고. 이게 자꾸 내 마음에 남습니더.” 백씨가 말했다.

허씨는 “인생 돌이켜보면 고생한 것밖에 없는데 이제는 아무 생각없심더. 우리 가족 먹고사는 걱정만 하면 되니까 고민도 없고예.”

글·사진=최보규기자 choi@yeongnam.com
※이 기사는 경상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인 2017-미국 서부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
공동기획:인문사회연구소, fride GyeongB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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