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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떠난 홍도 여행에서 일몰을 바라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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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여행 때 유빙관람선 안에서의 천진난만한 중년들. |
2001년, 청소년 관람불가의 조폭영화가 흥행에 성공한다. “니가 가라 하와이” “마이 묵었다 아이가, 고마해라” 같은 지금도 눈과 귀에 생생한 대사와 장면을 남기며 오랜기간 회자된 영화, 바로 ‘친구’다. 조폭을 미화한다는 반대 여론에도 필자는 이 영화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극장에서만 3번을 봤다. 수컷들만의 우정이야기에 필이 꽂혀버린 것이다.
결혼 후 술 한 잔 기울일 여유 사라지며
靑春 함께한 그 많던 오랜 벗들과 소원
그렇다고 이대로 주저앉을 수만은 없어
대학 동기와 연극반 선후배 모임 재개
“죽기 전에 어디라도 가자” 그들과 여행
고독한 중년 삶의 질 높이는 ‘삶의 활력’
영화의 포스터에는 친구의 정의가 적혀 있다. ‘오래두고 가까이 사귄 벗.’ 문득 나에게 친구가 얼마나 남아있을까 생각해 본다. 휴대전화의 전화번호를 검색하다가 손이 부끄러워 그만 뒀다. 오랜 친구들은 가까이 없고, 지근거리의 사람들은 오래두고 사귀지 않아 깊이가 없다. 오랜 친구라고 생각했던 이들도 연락 안 하고 산 지 몇 년이 지났다. 가슴 한 구석에 구멍이 뚫리고 그 사이로 서늘한 바람 한줄기가 지나간다.
중년 남자 이야기. 이번 주는 친구에 관한 내용이다. 오래된 농담 중에 이런 게 있다. 호탕한 데다 포용력까지 갖춘 남자들 사이에서는 위아래 10년까지는 모두 친구다. 그렇게 한 사람씩 친구를 맺어가다보니 어느새 아버지 친구와 친구가 돼 있다는 70년대식 개그다. 그렇게 온 세상 사람들이 친구였던 시절이 있었다. 도대체 그 많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청춘을 함께 보내던 친구들이 소원해지는 시기는 ‘결혼’과 맞물린다. 술자리에서 마지못해 먼저 일어나던 친구들은 차츰 자취를 감췄다. 아이 돌잔치 때나 연락이 왔고, 그마저도 먹고살기 힘들고 애 키우기 힘들다는 핑계로 뜸해진다. 직장에서는 자리를 잡아야 하고, 가정에서는 가장의 역할을 충실히 하다보면 맘 놓고 술 한 잔 기울일 여유가 사라진다.
어쩌다 친구들을 만나면 좋을 때도 있지만, 오랜 시간과 공간의 거리에서 다가오는 어색함도 있다. 자주 못 만나니 대화의 공통주제도 얕고 짧다. 자연스럽게 추억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는데, 추억이 늘 좋은 것만 있는 건 아니다. 추억은 곱씹을 때나 좋은 거지 다음 날 숙취와 함께 다가올 때는 허무함 그 자체다.
그렇다고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다. 하버드대의 연구에 따르면 건강한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지만 친구가 없는 사람이, 흡연과 음주를 하고 운동을 하지 않지만 친구가 있는 사람에 비해 3배 가량 일찍 사망했다. 가족, 배우자의 존재보다 사망률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좀 더 거칠게 표현하면 ‘친구가 없으면 빨리 죽는다’는 얘기다.
외로운 중년. 때는 바야흐로 친구를 되찾을 시간이 왔다. 단순히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서가 아닌, 인생의 고독에서 벗어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우리에겐 친구가 필요하다. 필자에게는 만나면 편한 두 그룹의 친구들이 있다. 한 그룹은 대학 연극반 선후배이고, 나머지 역시 대학동기다. 초등학교 동창은 ‘아이러브스쿨’의 쇠퇴와 함께 다들 연락이 끊겼고, 몇 안되던 중·고등학교 친구도 휴대전화 분실과 더불어 실종됐다. 스무 살에 만나 20여 년을 함께해온 대학 친구들만이 내게 남은 유일한 벗이다. 물론 각자 사는 지역이 다르고 벌려놓은 일도 많아 자주 만나지는 못한다. 아니, 얼마 전까지 그랬다.
한동안 못 만나던 친구들과 여행을 계획했다. 밤기차를 타고 목포로 내려갔다. 목포 앞바다에서 낙지 탕탕이를 안주로 먼동이 틀 때까지 술을 마셨다. 첫배로 홍도에 들어가서는 아무도 없는 해변에 앉아 낮술을 마셨고, 전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일몰을 봤다. 그러면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 기억이 너무나도 좋아서 그 후로 1년에 2번씩은 반드시 여행을 간다.
연극반 선후배의 모임도 마찬가지다. 선후배의 모임이다 보니 가장 나이 많은 선배와 막내 사이에 10년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중년을 넘어서자 모두 친구로 어우러졌다. 여행의 시작은 큰 형님 죽기 전에 어디라도 한번 가보자는 농담에서 시작됐다. 마침내 겨울이 끝나갈 무렵 누군가의 죽기 전 소망이었던 홋카이도의 유빙을 보러 떠났다.
낯선 곳을 여행하는 재미보다 낯익은 사람들과 함께한 편안함, 그리고 그들과 밤새 나눈 대화가 훨씬 값진 보석으로 남았다. 꿈을 상실해가는 중년의 방황과 고민에 대해 허심탄회하고 때론 적나라한 대화가 오갔다. 남자들의 수다는 터져버린 꽃망울보다 농염하게 무르익어갔다.
두 모임 모두 그 후로 꾸준히 연결되고 있다. 여행이라는 고리가 촉매제 역할을 하지만, 본질은 함께하는 시간이 행복해서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고 시간 한번 맞추려면 달력을 몇 번씩 들었다 놔야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떠나는 시간이 얼마나 유익한 삶의 원동력인지 알게 되고 나니 다들 적극적이다.
중년의 남자에게는 어찌할 수 없는 고독이 존재한다. 고독이란 세상에 홀로 떨어진 것 같은 외롭고 쓸쓸한 감정이다. 그런 고독은 마음속에 빈 공간을 만들며 누군가가 채워주기를 갈망한다. 자칫 아침드라마의 소재로 사용되는 다른 존재가 치고 들어오기 쉬운 공간이다. 주변에서 그런 상황을 많이 봐 왔지 않던가.
우리에게는 잊고 지냈던, 혹은 미뤄뒀던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 내가 먼저 연락하고 손 내밀면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그때 그 시절의 단짝으로 돌아갈 수 있다. 서로의 고독을 채워주는데, 오래두고 가까이 사귄 벗만한 존재가 어디 있으랴.
어린 시절, 골목 끝 대문 앞에 서서 “누구야, 놀자!”라고 외치면 먹던 밥숟갈을 내팽개치고 뛰쳐나오던 친구들이 있었다. 밤이 이슥해질 때까지 공터와 동네를 누비고 다니던, 함께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는 동무들이었다. 이제 당신이 외칠 차례다. “같이 놀자 친구들아!”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어진 지금, 그때의 친구들과 함께 늙어가는 것만큼 행복한 여생이 또 어디 있겠는가.
칼럼니스트 junghyuk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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