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강제징용돼‘고구마 훔쳤다’참수

  • 입력 2017-08-16 07:45  |  수정 2017-08-16 08:49  |  발행일 2017-08-16 제16면
억울한 죽음 70년만에 위령비 등재
봉화출신 박희태씨 유가족
2년간 끈질긴 고인 흔적 정리
양심적 日시민단체 도움받아
오키나와현에 적극적으로 요구
20170816
일제 말기 일본 오키나와에 끌려와 숨진 박희태씨의 이름(흰색 밑줄)이 새겨진 오키나와현 평화기념공원 내 위령비인 평화의 초석. 연합뉴스

일제 말기 일본 남단 오키나와. 박희태씨(당시 25세)는 고향인 봉화에 딸과 부인을 남겨둔 채 이곳에 군속(군무원)으로 끌려왔다. 계속되는 전투에 극도로 식량이 부족해 영양실조로 죽어 나가는 사람이 속출하던 상황. 오키나와 각지를 돌며 참상을 온몸으로 겪던 박씨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민가의 고구마를 훔쳐 먹었다.

이 사실은 바로 들통이 났고, 일본군은 그 자리에서 고향에서 같이 온 3명의 조선인과 함께 박씨의 목을 베었다. 한창 젊은 나이에, 조국에 남겨 놓고 온 가족들을 뒤로한 채 타향에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박씨는 끝내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유골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15일 시민단체 ‘오키나와 한(恨)의 비(碑)’와 오키나와현 등에 따르면 박씨의 이런 안타까운 죽음은 일본의 양심 있는 시민들에 의해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게 됐다. 지난 6월 오키나와현 평화기념공원 내 위령비인 ‘평화의 초석’에 뒤늦게나마 이름이 새겨져 이곳을 찾는 이들로부터도 위령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연간 38만명가량이 찾는 이곳은 오키나와 전투의 희생자를 기리고 평화를 기원하는 대표적인 장소다. 전몰자 모두를 기억하자는 뜻으로 1995년 세워졌다.

현재 24만명의 이름이 이 초석에 새겨져 있지만, 한반도 출신자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평화의 비를 관리하는 오키나와현이 한반도 출신자들에 대해 유족 스스로 사망 상황을 입증할 것을 요구하며 엄격한 기준을 들이댄 결과다.

일본 시민단체 ‘오키나와 한의 비’ 측은 박희태씨 유족의 부탁을 받고 2년여에 걸쳐 고인의 흔적을 좇고 유족의 진술을 정리했다. 소극적인 오키나와현 측에 계속 이름을 새겨 넣으라고 요구했고 결국 받아들여졌다. 유족들이 이 단체를 통해 오키나와현 측에 제출한 진정서에 따르면 박씨는 고향에서 일본인에 의해 전기고문을 당한 뒤 마음의 병을 겪었다. 마을 이장은 다른 7명의 이웃과 함께 박씨를 일본에 보냈다.

현지에서 참수를 당했다는 슬픈 소식은 살아 돌아온 동료들을 통해 가족들에게 전해졌다. 남겨진 아내와 딸은 가난에 시달리며 힘든 삶을 살았다. 고인의 딸은 “아버지가 징용을 간 뒤 일본으로부터 어떠한 연락도 없었다. 유골을 받지 못해 묘도 쓸 수 없었고 그동안 생사를 몰라 제사도 모시지 못했다"며 “일제는 유골 위치 등을 유족들에게 알려주고 가족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배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6월 오키나와현은 박씨와 권운선씨 등 한반도 출신자 15명의 이름을 이 비석에 새겨 넣었다.

이로써 비석에 새겨진 한반도 출신자 수는 462명이 됐지만, 일제 말 8천명가량의 젊은 청춘이 끌려와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 것에 비해 극히 일부일 뿐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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