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칼럼] 1천61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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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8-16   |  발행일 2017-08-16 제30면   |  수정 2017-08-16
성범죄 복역하는 30대 남성
피해자 거짓신고 증명 석방
형사보상청구를 대리하고
보상금이 확정되고 나서야
내가 맡은 사건 종결되었다
20170816
정혜진 국선전담변호사

점심을 먹고 사무실에 들어오니 직원이 책상에 법원 서류를 하나 얹어둔 게 보였다. K에 대한 형사보상청구 결정문이다. 지난 연말에 청구해 놓고 언제 결정이 나나 싶어 몇 개월째 조바심을 내던 사건이다. 긴장된 마음으로 결정문을 열었다. “주문 : 청구인에게 형사보상금 1천610만원을 지급한다.” 1천610만원! 일반 서민 누구에게라도 그리 적은 돈은 아니겠지만, K에게 이 돈이 갖는 의미를 아는 나는 마치 내가 그 억울한 세월을 보상받기라도 한 양 가슴이 울컥했다.

K는 10대 가출 청소년에 대한 두 번의 성범죄 전력으로 총 2년4개월의 형을 복역했다가, 출소한 지 반 년도 안 돼 열아홉 살 여자를 추행했다는 혐의로 다시 구속되었다. 그는 “이번에는 진짜 만진 적이 없다”고 했다. 동종범죄 전력으로 두 번이나 실형을 받은 K의 말을 누가 믿어줄까. 1심 국선 변호인이었던 나는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증거 조사를 할수록 피해자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고, 결국 피해자가 다른 목적으로 거짓 신고를 했던 게 명백해졌다. K는 체포된 지 161일 만에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형사 사건으로 구금되었던 자가 무죄 판결을 받고 그 판결이 확정되면 국가는 구금된 기간에 대해 보상해야 하는데, 그게 형사보상이다. 어리석었던 과거를 진심으로 반성하고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매일 새벽 5시면 인력시장으로 향했던 젊은이에게 동종범죄 전과자라는 낙인이 얼마나 가혹했을까. 그 생각을 하니 국선변호 업무는 끝났지만 형사보상청구 대리를 안 해 줄 수가 없었다. 당시 K가 벌 수 있었던 소득과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로 하루 10만원씩을 청구했는데 전액 인용받은 거다.

K에게 출근길에 사무실에 좀 들르라고 연락을 했다. 오후 4시가 다 되어갈 무렵 K가 왔다. 출소 후 K는 배달 대행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회사에서 리스해 준 오토바이를 타고 대기하고 있다가 배달 주문 알림이 오면, 대리기사가 ‘콜’을 잡는 것처럼 큰 휴대폰같이 생긴 단말기에서 주문 콜을 잡아 배달을 한다. 오후 4시부터 새벽 4시까지 일하고 하루 10만~12만원 정도 번다고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다시 오전 9시까지 24시간 운영하는 한 식당 주방에서 일하고, 5만원씩 더 번다. 하루 17시간을 일하는데도 아직 돈을 많이 모으지는 못했다고 했다. 갚아야 할 빚이 좀 더 있어서란다.

“보상 결정 나왔어요.” 밝은 표정의 나를 보면서도 K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돌았다. “그럼 얼마나 받을 수 있는 건가요?” 그의 질문에 나는 “직접 보세요”하며 결정문 정본을 건네주었다. 마흔을 코앞에 둔 건장한 남자는 결정문 주문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들지 못하는 동안에도 배달 대행업체 조끼에 달린 배달 단말기에서는 주문을 잡으라는 신호인지 “삑” “삑” 하는 소리가 연신 울려댔다.

이 돈으로 뭐하고 싶은지 물어봤다. 그제야 눈가를 훔치며 고개를 든 K는 늘 그렇듯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말을 한다. “틀니부터 해야죠. 600만원 든다고 해서 엄두도 못 내고 있었거든요. 구속되기 전에 이가 5개 빠졌어요. 원래 잇몸이 약한데 구치소에서 치료를 못 받으니까 출소하고 나니 더 빠지더라고요. 앞니도 다 빠지고 이가 절반밖에 없어서 말 할 때 입을 가리고 하고 맨날 죽만 먹었거든요. 치료하고도 돈이 남으니까 지하철역에서 청소일하는 엄마가 작은 식당 내고 싶어 하는데 돈을 보태주고 싶어요.” K의 어머니는 K가 출소한 지 6개월도 안 돼 또 구속되자 “모자(母子) 인연을 끊는다”며 구치소에 면회 한 번 오지 않았다고 한다. K가 무죄 판결 받고 집에 돌아오자 그제야 “나도 너를 못 믿었다”며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정말 뭐라고 감사드려야 할지….” 그는 또 훌쩍인다. “삑” “삑” 자꾸 울어대는 배달 단말기를 가리키며 나는 얼른 출근하라고 그의 등을 밀었다. K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 고개를 깊게 숙이고 인사를 했다. 이제야 내가 맡았던 K의 사건이 완전히 종결되었다.정혜진 국선전담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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