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영남일보로 보는 시간여행’ .16] 호열자 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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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8-17   |  발행일 2017-08-17 제29면   |  수정 2017-08-17
1946년 최악 콜레라…대구·경북 3천5백여명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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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옥이 40호에 불과한 달성군 논공면 하동은 30명의 콜레라 환자가 발생해 13명이 사망하는 등 마을이 전멸하다시피 했다.(영남일보 1946년 8월4일자)

‘방역운동은 읍촌을 불문하고 활발히 전개되는 이때에 동민의 부주의인지 달성군 논공면 하동일구에는 전 호수가 40호에 불과한데 환자 수는 2일 현재 30명, 사망자는 이미 13명이란 다수를 내어 전전긍긍이라 한다.’(영남일보 1946년 8월4일자)

집이 40채에 불과한 작은 마을에서 30명의 환자가 발생해 13명이 숨을 거뒀다. 성한 집이 없을 정도로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호열자(虎熱刺) 때문이다. 호열자는 호랑이가 살점을 뜯어내듯 고통을 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 괴이한 병이라는 이름의 괴질로도 불렀다. 바로 콜레라다. 당시 콜레라는 높은 치사율로 인해 발병하면 단번에 사람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았다.

전염병에다 여름 물난리 겹쳐
논공 40가구 마을서 13명 사망
균 퍼진 川에 오물버리고 빨래
당국 방역활동·이동통제 한계
가족 잃고 생활고 겪다 자살도


8·15 광복 직후는 열악한 위생환경 탓에 전염병이 수시로 찾아왔다. 1946년 해가 밝자마자 천연두와 발진지브스(발진티푸스) 환자가 줄을 이었다. 다급해진 경북도는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동운정(현 대구시 중구 동인동)에서 운영하던 종두약 연구소를 접수해 약품제조를 서둘렀다. 또 경찰이 하던 위생(전염병) 조사를 부의 행정기관으로 옮겼다. 경찰의 고압적인 자세로 인해 환자가 발생해도 부민들이 알리기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6월 초순 경북도내에 발생하기 시작한 콜레라는 짧은 시간에 환자가 급속히 늘었다. 게다가 7월에는 물난리까지 겹쳐 사태는 더욱 악화됐다. 경북도청과 대구유치장에도 콜레라 환자가 발생했다. 부내 변두리와 시내는 물론 민간이나 관을 가리지 않았다. 8월 중순 경북방역본부가 파악한 도내 환자는 4천100명이 넘었고, 2천500여명이 숨졌다. 그중 대구에서만 1천400여명의 환자가 발생해 1천50여명이 사망했다.

콜레라 전염을 막기 위한 교통 차단과 방역활동도 좀체 성과를 내지 못했다. 당국의 대처도 허술했지만 부민들의 비협조도 한몫했다. 예컨대 달성공원 북편으로 흘러가는 개천과 미나리꽝에는 호균이 있는 것으로 드러나 경찰이 통제에 나섰다. 그럼에도 경관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 물에 걸레를 빨고 심지어 환자의 대소변까지 버렸다. 게다가 밤에 호균이 있는 미나리를 베어 시장에 파는가 하면 교통차단선을 넘어 탈출한 환자 가족도 나왔다. 대구경찰서장이 이를 우려하는 담화를 낼 정도였다.

‘~조수용씨는 거반 호마로 처자와 조카 두 명을 잃고 빈한한 살림살이와 무서운 고뇌에 잠겨있던 바 지난 6일 오후 6시경 채소밭에 나가다가 이순경에 발견되어 언쟁이 벌어지자 조씨를 달성파출소에 데려가서 설유(說諭)하여 돌려보냈는데 비관에 빠진 조씨는 달려오는 화물차에 투신자살하였다.~’(영남일보 1946년 7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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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는 감당하기 힘든 개인에게 삶을 송두리째 빼앗고 가족마저 파괴시켰다. 어른들은 죽고 어린애만 살아남은 비참한 가정도 적지 않았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의료와 돌봄의 손길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죽고 사는 문제였다. 예나 지금이나.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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