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편안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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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8-17   |  발행일 2017-08-17 제30면   |  수정 2017-08-17
첫날 영화 ‘군함도’관람하고
다음 날에는 대구문학관과
음악감상실 녹향을 찾았다
마지막날 미술관에 갔다가
책 읽고 TV 보고 먹고잤다
[여성칼럼] 편안한 휴가
허창옥 수필가

미술관 앞 작은 연못이 참 예쁘다. 분홍꽃 만개한 배롱나무들이 연못을 감싸고 있다. 조용히 내리는 비는 수면에 무수한 동그라미를 그린다. 오랜만에 내리는 비가 반갑다. 그래서인지 미술관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온 젊은 엄마들이 많다. 아이들과 젊은 여인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는 세상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전시실에서 ‘꽃들의 충돌’ ‘긴장과 이완’을 감상하며 표현과 장치에 담긴 작가들의 의도와 메시지를 가늠해본다. 색(色)과 선(線), 조형과 공간의 아름다움을 천천히 새기며 본다. 난해한 주제들이다.

휴가를 어떻게 보낼까 고심했다. 피로가 쌓인 끝에 맞이하는 황금시간이다. 허투루 보내면 아쉬움이 클 것이다. 이제 길 떠날 용기가 나지 않는다. 젊어서는 염천에도 신명이 나서 아이를 안고 걸리며 길을 나섰다. 교통체증에 시달리는 고속도로, 뜨거운 모래톱과 바다, 자리 잡기 힘든 계곡, 하염없이 줄을 서는 공항, 다 자신이 없었다.

첫날은 ‘군함도’를 관람했다. 숨 쉴 틈도 주지 않을 만큼 절박하고 처절했다. 슬펐다. 그 지독한 아픔의 흔적을 반성 없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이웃’이라는 그 나라 일본, 분했다.

다음 날에는 대구문학관을 둘러보았다. 시간에 쫓겨서 주마간산으로 보았던 게 아쉬움으로 남아있었다. 아래층의 향촌문화관에서 대구의 근현대문화를 이끌었던 향촌의 명소들, 도심의 거리, 학교, 시장,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흑백영상을 보았다. 참으로 그리운 정경들이었다. 극장, 다방, 레코드사, 양복점, 양품점, 공구사들을 재현해 놓은 옛 골목을 느릿느릿 걸으며 그 시대 우리 부모님들의 애환을 생각했다. 전쟁과 피란의 지난한 고통을 견뎌내고, 가난과 고단함 속에서도 잃지 않았던 희망에 감사했다.

대구문학관은 숨을 죽이고 살펴보았다. 책으로만 보았던 현진건, 이상화, 이장희, 유치환, 구상, 이윤수 등 문인들의 자취를 더듬어보는 일이다. 6·25전쟁 때 문인들의 활동 중심지가 되어서 ‘전선문학’ ‘전선시첩’ 등의 출간은 한국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이며 대구의 자긍심이기도 하다. 옛 문인들의 시집과 소설집의 낡은 표지들, 오래된 문예지들을 보면서 외경을 느꼈다.

기념품 몇 점을 사서 문학관을 나왔다. 배가 고팠다. 옛날 국숫집에서 잔치국수를 먹고 실버극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카사블랑카’를 예매해두었다. 많이 와 보고 싶었던 곳이다. 어르신들이 보내는 노년의 시간을 생각해보고 싶었다. 추억 속의 영화를 다시 감상하며 명화의 감동을 느껴 보고도 싶었다. 오랜 세월 회자되었던 공항 장면, 그 아름다운 거짓말과 이별의 애틋함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라 여겼다. 공교롭게도 전날 보았던 ‘군함도’와 시대적 배경이 같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큰 전쟁을 일으킨 나라들에 의해 세계의 이쪽과 저쪽에서 수많은 인명이 짓밟히고 희생되었던 것이다. 마음이 많이 아렸다.

다시 문학관으로 향했다. 지하에 있는 유서 깊은 음악 감상실 ‘녹향’의 문을 열었다. 몇 사람이 띄엄띄엄 앉아있다.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의 공연 실황이 상영되고 있었다. 오페라는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 돈 호세가 집시 카르멘에게 사랑을 애걸하는 장면을 이어가고 있었다. 카르멘은 냉담했다. 돈 호세가 카르멘을 찌르고 자신도 운명을 다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우리 가곡 몇 곡과 이탈리아 가곡 몇 곡을 더 감상하였다. 영화에서 받은 아픔을 위로받는 시간이었다.

미술관에서 휴가의 마지막 날을 보낸다. 3층 라운지에 앉아서 비에 젖는 짙푸른 나무들을 바라보며 쉬고 있다. 가고 싶은 곳에 가서, 보고 싶은 것을 본 충만한 시간이었다. 나머지 시간은 집에서 먹고, 텔레비전 보고, 책 읽고, 잠잤다. 편안한 휴가였다. 사람마다 휴가를 보내는 방식이 다르겠거니와 자신에게 즐겁고 의미 있는 시간이면 족하지 않을까. 허창옥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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