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웅의 나무로 읽는 삼국유사] ‘김수로왕 신화의 현장’ 김해 구지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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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8-18   |  발행일 2017-08-18 제39면   |  수정 2017-08-18
許왕후는 인도서 시집올 때 茶나무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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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숲속의 구지봉에서 아이들이 손잡고 ‘구지가’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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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숲속에 자리한 김수로왕릉과 납릉정문. 작은 사진은 김수로왕릉 정문에 새겨진 쌍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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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나무 배와 상수리나무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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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왕 신화의 현장은 경남 김해에 풍부하게 남아있다. 김해 지역에는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릉과 허왕후릉 및 구지봉이 신비로운 이야기를 전해준다. 구지봉은 하늘에서 내려온 김수로가 가락국왕으로 등극하는 신화적 현장이다. 신비로운 축제의 현장인 구지봉에서 구간(九干)들이 김수로왕을 맞이하면서 부른 노래가 ‘구지가(龜旨歌)’다. 김수로왕은 구지가를 통해서 가락국왕이 되는 신화적 인물이다. 그럼에도 가락국 신화는 역사적으로 패배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래서 역사의 흥망성쇠를 넘어선 생태문화적 관점에서 가락국 신화를 재구성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자 한다.

가락국 시조 탄생지이자 ‘구지가’ 산실
印 아유타국 공주와 결혼 북방문화 교류
왕후릉 파사석탑과 왕릉 쌍어紋이 방증

김해박물관의 녹나무 배·상수리나무 櫓
김수로-허황옥의 국제결혼 신빙성 더해
구지봉 가는 길엔 소나무·차나무 줄지어



일연 스님이 편찬한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김수로왕이 하늘에서 구지봉으로 내려오는 신화적 내용으로 가득하다. 천지가 개벽한 후로 아직까지 나라의 이름도 없고 군신의 칭호도 없었다. 다만 구간이 백성들을 통치했는데 그 수가 100호에 7만5천명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산야에서 우물을 파서 마시고 농사를 짓고 살았다. 서기 42년 3월 북구지에 주민 300명이 수상한 소리를 들었다.

(김수로왕이) “거기 누가 있는가?”라 묻자 구간 등이 대답했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고?”라고 물으니, “구지봉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하늘이 내게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 하니, 너희는 저 봉우리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어라. ‘거북아 거북아(龜何龜何)/ 머리를 내어라(首其現也)// 내놓지 않으면(若不現也)/ 구워서 먹으리(燔灼而喫也)’ 그러면 하늘로부터 대왕을 맞이하여 기쁘게 뛰어놀 것이다.”

이러한 ‘구지가’의 이야기는 가락국 시조인 김수로왕의 탄생을 신비롭게 서술하고 있다. 구간과 백성들은 김수로왕을 맞이하는 신비로운 축제의 현장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조금 후 공중을 쳐다보니 붉은 끈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드리워졌다. 그곳을 살펴보니 붉은 보자기 속에 금합자가 있는데 열어보니 황금알 6개가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놀라 기뻐하면서 절을 올리고 금합자를 아도간 집에 두었다가 그다음 날 열었더니 금합자의 알이 모두 동자로 변했다. 열흘이 지나 6명의 동자는 구척이나 성장해 각각 왕위에 올랐다. 그중에서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라 하고 국호를 ‘대가락’이라 했다.

가락국 김수로왕은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백성들을 다스렸다. 그런데 완하국 함달왕의 부인이 알을 낳았는데 사람으로 변했다. 그가 바다에서 온 석탈해다. 탈해는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다”고 말했다. 그래서 수로와 탈해는 술법을 겨루기로 했다. 탈해가 매가 되자 수로는 독수리가 됐다. 탈해가 참새가 되자 수로는 새매가 됐다. 탈해는 생명을 보전하는 수로의 어진 마음에 감탄하면서 길을 떠났다. 석탈해와 경쟁에서 승리한 김수로는 가락국왕으로서 백성의 생명을 잘 보살폈다.

신화적 인물인 김수로왕은 백성의 존경을 받았지만 배필을 구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다. 수로왕의 결혼은 북방과 남방의 문화가 교류한 모습을 보여준다. 김수로왕은 인도 아유타국 공주인 허황옥과 국제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허왕후릉의 비석에는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陵)’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가락국기’에 의하면 허황옥은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였는데 16세에 배를 타고 김해로 들어와서 수로왕의 왕비가 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허황옥의 고향 아유타국은 어디일까? 허황옥은 인도 아요디아에서 배를 타고 중국 쓰촨성 보주로 이주한 뒤 다시 김해로 들어온 도래인이다. 그 증거가 허왕후릉 오른쪽에 있는 ‘파사석탑’에 남아있다. ‘삼국유사’ 탑상편의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에는 허왕후가 이 탑을 배에 실어서 풍파를 진정시켰다고 한다. 이 때문에 파사석탑의 돌은 김해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붉은색을 띠고 있다.

또한 김수로왕릉의 납릉정문에는 쌍어문이 있다. 물고기 두 마리가 탑을 보호하는 쌍어문은 인도 아요디아에서 김해까지 연결되는 허황옥의 이동경로를 보여주는 문화인류학적 증거다. 예전에는 허왕후릉에도 쌍어문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허황옥의 고향인 인도 아요디아에는 신성한 건물에 쌍어문이 새겨져 있다. 쌍어문은 신성한 탑이나 건물을 보호하는 수호신의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김해로 들어온 허황옥은 무슨 나무로 만든 배를 타고 왔을까? 허황옥은 아마도 녹나무로 만든 배를 타고 왔을 것이다. 소금기에 강한 녹나무는 기온이 따뜻한 아열대지역에서 30m까지 자라서 배를 만들기에 적당했다.

김해박물관에는 녹나무로 만든 배와 상수리나무로 만든 노가 전시돼 있다. ‘가락국기’에는 허황옥이 처음 뱃줄을 내리고 건너온 나루터를 주포촌, 허황옥이 비단바지를 벗었던 언덕을 능현, 붉은 깃발이 바닷가로 들어오던 곳을 기출포라고 한다. 이런 지명은 허황옥이 국제결혼을 했다는 신빙성을 더해준다.

수로왕 부부의 능에는 돌을 쌓아서 둘레석을 만들어놨다. 수로왕릉에는 세월의 무게를 보여주는 아름드리 팽나무를 비롯해 소나무, 왕버들이 살고 있다. 허황옥릉에도 소나무가 새들의 보금자리로 활용되고 있다. 수로왕릉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위치와 일치해 신빙성을 더해준다. 1647년에는 ‘가락국 수로왕릉’이라고 새겨진 능비를 세웠다고 한다. 허황옥릉에서 구지봉으로 가는 길에는 차나무를 줄지어 심어놨다. 허황옥이 인도에서 가져온 차나무의 후손이라고 전해진다. 고려 말기 우왕이 이 차를 마셔보고 ‘장군차’라는 이름을 내려줬다고 한다.

김수로왕 신화의 현장에는 허황옥의 능은 없고 수로왕비 능만 있다. 수로왕비로 존재하는 허황옥의 이름을 되찾아주는 것이 필요하다. 생태문화의 소중한 가치는 사람뿐만 아니라 생명체를 평등하게 대해주는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경북대 기초교육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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