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맹의 철학편지] 막말은 그들의 ‘세계관’이고 그들의 ‘이데올로기’에서 나오는 ‘진심’일 거라 생각해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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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8-18   |  발행일 2017-08-18 제39면   |  수정 2019-03-20
20170818

“미친놈들이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급식소에서 밥하는 아줌마들이야.”

“밥하는데 왜 정규직 되어야 하나. 옛날처럼 그냥 교육시켜서 시키면 된다.”

한 국회의원이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남긴 말이야. 노동자들의 파업을 ‘미친놈들’의 짓으로, 학교 급식소의 노동자들을 그저 ‘밥하는 아줌마들’로, 그들의 노동을 그냥 아무것도 아닌 일로 규정짓는 ‘막말’이야. 그런데 태형아, 이것이 그저 한 정치인의 막말이기만 한 것일까?

국어사전에 막말의 뜻을 찾아보면 ‘되는 대로 함부로 말하거나 속되게 말하다’라고 되어 있어. 그러나 그 정치인은 결코 되는 대로 함부로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내 생각이야. 그 정치인뿐만 아니라 많은 정치인들의 막말도 결코 막말이 아니라는 것이 내 생각이야. 그들은 자신들만의 구체적인 논리 속에서 이 말을 뱉고 있는 거지.

위의 말을 다시 살펴보면 그것은 최소한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파업권을 미친 짓으로 생각하고 육체노동을 비천한 일로 생각하고 있으며, 여성 노동자의 노동을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 이것은 막말이 아니라 그들의 ‘세계관’이고 그들의 ‘이데올로기’에서 나오는 ‘진심’일 거라고 나는 생각해.

우리는 세상을 이데올로기라는 창을 통해 바라봐. 사전적으로 풀어보면 이데올로기란 ‘개인이나 사회 집단의 사상, 행동 따위를 이끄는 관념이나 신념의 체계’를 말해. 고전적 정치철학에서는 이런 이데올로기란 것이 부르주아의 신념이므로 걷어내야 할 장막이라고 생각돼.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결코 이데올로기라는 틀 바깥에서 바라볼 수가 없어. 이런 생각을 전개한 사람 중에 대표적인 철학자가 알튀세르(1918~90)야.

그는 “이데올로기는 그들의 실제 조건에 대한 개인들의 상상적 관계를 표현”하며 그리고 “이데올로기는 물질적 존재를 갖는다”고 말해. 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지?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중요한 관점을 보여주고 있어. 우리는 ‘백지의 상태’에서 객관적으로, 공평무사하게 삶과 세상을 판단해야 한다고 말하곤 해. 그러나 이데올로기론에 의하면 그런 판단과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지.

이해를 위해 처음의 예로 돌아가 그곳에는 어떤 ‘상상적 관계’가 들어있는지 보자. 노동자의 파업이 미친놈들의 짓인 이유는 대기업, 재벌, 고소득층 등 선도부문의 성과가 늘어나면, 연관 산업을 이용해 후발·낙후 부문에 이 부가 유입되는 효과, 즉 ‘낙수 효과(Trickle down effect)’가 발생하므로 노동자의 파업은 사회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는 짓이라는 논리지. 또한 세상을 이끌어가는 것은 미숙련, 저교육의 아줌마가 아니라 선도산업의 경제적 엘리트와 정치적 엘리트에 의해 이뤄졌고 최소 정규직 남성노동자의 노동의 결과라는 것. 미숙련·저교육의 노동자는 언제나 값싼 노동력으로 대체할 수 있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역사의 순리라고 해석하고 있는 거지.

그러나 이런 상상적 상태는 역사적으로 한번도 입증된 바가 없는 근거없는 주의·주장일 뿐이야. 흔히 예를 드는 북유럽 복지국가는 역사적으로 강력한 노동조합의 힘에 바탕한 것이었어. 일반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부는 언제나 선도부문이 독차지했지. 그리고 노동자의 노동을 바라보는 이런 태도는 ‘그들의 실제 삶의 조건’에 대응하는 물질적 관계가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을 거야.

그런데 태형아, 문제는 이런 이데올로기의 창을 지배자나 부르주아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일반대중도 가지고 있다는 점이야. 앞에서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모든 것을 빼앗긴 ‘없는 자’가 많은 것을 가진 힘 ‘있는 자’의 편을 드는 것, 혹은 ‘없는 자’가 한번도 실현된 적이 없는 자유와 평등의 세상을 꿈꾸는 것, 상반된 이 모두가 일반대중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야.

그러므로 이데올로기는 단지 머리속에서 이념으로,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야. 앞의 정치인의 말은 막말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가 가진 구체적인 물질적 조건 속에서 오랜 시간 만들어지고 가다듬어진 것이고, 그 말의 효과는 구체적인 물질적 현실을 통해 노동자에게는 구체적인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이라는 것이지.

이럴 때 이런 질문이 가능하겠지. ‘모든 것이 이데올로기적이라면 우리는 어떤 기준, 어떤 올바름을 가져야 하는가’하는.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그 기준은 대중에 대한 신뢰,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 타인과 함께 살아가고, 그들과 이야기하고, 그러다 나와 다른 그들과 논쟁하고 갈등하면서 우리는 어떤 ‘상생적 관계’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지 알아차리게 되지 않을까. 나는 그 상생적 관계가 ‘민주주의’라고 생각해. 만들어진 정치제도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끊임없이 민주화시키려는 그 노력을 통해 우리는 제대로 된 정치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상상해 봐. 그 속에서 앞서의 그 정치인은 발붙일 틈도 없겠지? 시인·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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