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비 걱정 없고…이만한 쉼터 없어”

  • 백승운,황인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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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8-19 07:30  |  수정 2017-08-19 09:07  |  발행일 2017-08-19 제6면
■ 반월당역 광장의 노인들
2층 식당가에서 점심 해결
살충제계란 등 현안 토론도
20170819
대구 지하철 반월당역 광장이 노인들의 새로운 쉼터로 인기를 얻고 있다. 지하철요금이 들지 않고 무더운 여름철에도 종일 에어컨 바람이 나와 이른 아침부터 역 광장에는 노인들로 북적인다. 황인무기자 him7942@yeongnam.com

대구 도시철도 반월당역 광장은 노인들의 새로운 쉼터다. 이른 아침부터 의자가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노인들이 무리를 짓는다. “어이! 왔어?” “오랜만이네!” “소식 들었어? 김씨가 큰 병 들어서 입원했다네. 오래 살아야 하는데 걱정이야.” 안부 인사가 오가는 사이, 역 광장은 노인들의 수다로 시끌벅적하다.

“여기만 한 곳이 없어. 더위가 한풀 꺾이기는 했지만, 야외 공원은 아직 더워서 오래 못 앉아 있거든. 지하철역은 종일 에어컨 바람 나오지, 비가 와도 걱정 없지, 우리 같은 늙은이들한테는 이만한 쉼터가 없어. 아침부터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라.”

역 광장을 가득 메운 노인들은 남녀 구분이 없다. 모자를 헐렁하게 눌러쓴 백발의 할아버지부터 꽃무늬 원피스에 화장을 곱게 한 멋쟁이 할머니까지, 개중에는 휠체어를 탄 노모를 모시고 나온 60대 아들도 한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가끔 그 틈새를 젊은이들이 끼어들기도 하지만 눈치를 살피다 금세 자리를 뜨고 만다.

“반월당역 광장에도 명당이 있어. 분수대가 있는 중앙무대가 제일 좋은 자리야. 앉을 자리도 많고 분수에서 쏟아지는 시원한 물줄기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거든.”

노인들이 몰리면서 실버세대를 겨냥한 가게도 문전성시다.

“저기 보청기 가게 보이지. 현수막에 써 놓은 것처럼 노인들한테 ‘무료 청력 테스트’를 해줘. 혹시나 해서 테스트 받았다가 보청기를 사 가는 사람을 많이 봤어. 신발가게도 노인들 취향에 맞는 신발을 많이 갖다놔서 장사가 잘돼.”

점심시간이면 노인들은 광장 2층 식당가에서 허기를 채운다. 양푼이 비빔밥부터 콩국수, 국밥, 고등어조림, 김밥까지 음식점마다 그들의 입맛에 맞는 메뉴들이 성찬이다. 이가 성치 않은 노인들은 죽이나 칼국수로 한 끼를 떼운다. 3천500~5천원의 ‘착한 가격’도 부담이 없다. 식사를 마친 노인들은 300원짜리 자판기 커피로 텁텁한 입을 달래며 다시 의자에 자리를 잡는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이들은 고급스러운 종이컵에 담긴 아메리카노로 호사를 누린다.

“점심 먹고 커피 한잔해도 1만원이 안 들어. 지하철 요금도 무료여서 오가는 데 교통비도 들지 않고. 돈이 궁한 요즘 같은 불경기에 하루를 보내기에 이만한 곳이 없지.”

역 광장은 때론 토론장이 되기도 한다.

“이제는 전쟁 나면 반나절이면 사람 다 죽어. 문재인(대통령)이가 주도권을 잡고 최악의 상황은 막아야 하는데, 트럼프한테 끌려가는 것 같아 걱정이야.” “아니지, 김정은이가 자꾸 핵 가지고 협박하는데, 이번에는 혼을 한번 내줘야 돼.”

노인들의 ‘썰전’은 ‘한반도 전쟁 위기’를 시작으로 ‘기초연금’ ‘살충제 계란’ ‘내년 지방선거’까지 끝이 날 줄 모른다. 이야기 중에 고성이 오가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박장대소다. 그들의 ‘요란한 썰전’ 속에서도 옆자리의 70대 할아버지는 한곳을 바라보며 미동도 없다. 눈앞의 사투에도 눈 하나 깜짝 않는 모습이다.

“여기도 오래 있으면 공기가 탁해서 조금 답답하기는 해. 그럴 때면 근처에 있는 백화점 구경도 하고, 아예 밖으로 나가서 가까운 동성로를 한 바퀴 돌아. 그럼 운동 되고 좋거든.”

해가 질 무렵이면 노인들은 썰물처럼 반월당역을 빠져나간다. “내일 보자”는 인사는 마치 ‘내일까지 살아있어’라는 마지막 당부처럼 들린다. 날이 새면 노인들은 다시 반월당역 광장으로 몰려든다.

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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