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진단] 과거만큼 정확한 것은 없다

  • 장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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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8-22   |  발행일 2017-08-22 제30면   |  수정 2017-08-22
새 정부 정책 취지는 공감
아찔한 속도에 불안한 시선
치적쌓기보단 긴 호흡 절실
내치로 인한 갈등 줄이려면
반면교사 통해 지혜얻어야
[화요진단] 과거만큼 정확한 것은 없다

어떤 시어머니가 성향이 각각 다른 며느리 2명에게 저녁상을 부탁했다. 둘 다 5만원을 가지고 장을 봐야했는데 역시나 상차림은 전혀 달랐다. 평범한 듯, 그러나 알고 보면 매우 이기적인 며느리는 적당히 구색만 맞추고 남긴 돈을 빼돌렸다. 반면, 눈은 높은데 손이 낮았던 다른 며느리는 형편도 생각지 않고 보여주는 데만 급급했다. 소고기도 사고 생선회도 뜨고 전복에다 갈비찜까지 거창하게 준비했지만 모자란 돈은 외상이었다.

시어머니는 둘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구린내 나게, 티 안나게 꼬불쳐서 자신과 자기 주변만을 위해 쓰려는 며느리는 당최 믿을 수가 없었고, 우선 쓰고 보자는 며느리는 살림 거덜낼까봐 몹시 불안했다. 시어머니 의중을 헤아려 정갈하면서도 분수에 맞게 저녁상을 준비하는 며느리는 아직 더 기다려야 하는가 보다.

출범 100일을 넘긴 새 정부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 거침이 없다. 적어도 내치에선 그렇다. 격식을 파괴하고 소통을 강화했다. 한껏 높아진 기대치를 담아 신선한 변화를 이끌고 있기에 역대 최고 수준의 지지율을 찍기도 했다. 사실상 탄핵이라는 격변을 거름 삼아 촛불로 완성된 만큼 상당한 지지동력을 확보했고 그를 바탕으로 국정을 핸들링하고 있다.

그런데 짧은 기간 동안 꽤나 많은 정책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면서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늘고 있다. 총론에서는 맞는 부분이 많고, 가는 방향도 그리 나빠보이지는 않는데 스물스물 다가오는 이 불안감은 뭔가. 아찔한 속도감은 낯설고 두렵다. 힘을 얻은 대신 겁을 상실한 것인가.

정부와 여당은 마이웨이를 외치고 있고 야당은 걱정과 비난 투성이다.

문재인정부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어느 누구도 부정하기 힘든 명분을 내세우며 질주 중이다. 이달 들어서만 세법개정안, 건강보험 보장 강화, 저소득층 3대 빈곤대책, 수능개편 시안, 아동수당 현금지급 및 기초연금 인상 등 하나같이 국민생활과 밀접한 행·재정적 정책을 내놨다. 취지와 당위성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과 경험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하게 만든다.

야당은 전형적인 포퓰리즘이라고 연일 쏘아댄다. 실행을 뒷받침할 재정계획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하고, 산타클로스마냥 오로지 퍼주기식 정책만 남발하고 있다고 발끈한다. 최근 대한민국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내로남불’의 전형이라면서 사사건건 각을 세운다.

‘조물주 위에 계신 분이 건물주’라는 우스갯소리가 확 와닿는 세상에서 돈 주고 혜택 늘려주겠다는데 싫어할 사람은 없을 듯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하고 불안한 시선을 보내는 국민들이 점점 늘고 있다. 팩트다. 한달치 용돈을 하루이틀 만에 신나게 쓰면 짜릿하겠지만, 그 후로는 주변에 민폐를 끼치기 십상이다. 이런 경우는 대개 이성보다는 감성이 앞선, 계획의 부재 내지 실패인 쪽에 속한다.

외교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다. 북핵과 사드배치 등으로 갈등이 뒤범벅된 주변국과의 관계에서 ‘말’ 빼고는 존재감이 별로 없다. 흔히 삥 뜯기는 아이들은 어느 구석에서 맨날 쥐어터지면서도 “말로 하자”고만 한단다. 일반적으로 집적거리고 패는 녀석들과 대화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었거나, 더이상 얻을 게 없는 경우에만 해당한다.

앞으로 5년 후 대한민국이 어떤 모습일지 참 궁금하다. 삶의 무게가 지금보다 훨씬 가벼워지거나, 여전히 가정과 나라를 동시에 걱정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위정자가 아무리 따뜻한 가슴을 가졌더라도 멀리 내다봐야 한다. 임기내 치적도 의미있겠지만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나라라는 점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될 일이다.

과거만큼 정확한 것은 없다. 역대 모든 정권은 한결같이 국민과 나라를 위한다며 출발했다. 그러나 끝이 아름답고 좋았던 정권은 지금껏 없었다. 권력자 본인이든, 주변이든 과욕이나 사심이 개입되면서 빚어진 결과다. 특정집단과의 소통은 또다른 누군가와의 불통을 증명한다고 했다.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반면교사(反面敎師)는 필요한 법이다.

장준영 (편집국 부국장 겸 사회부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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