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택시운전사, 기자, 독립운동가

  • 변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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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8-24   |  발행일 2017-08-24 제31면   |  수정 2017-08-24
[영남타워] 택시운전사, 기자, 독립운동가

압제(壓制). 지난 세기는 압제의 역사다. 일제 36년(1910~1945), 군부독재 27년(1961~1987). 무려 63년이다. 한 세기의 3분의 2 기간 민중은 폭력적 억압 하에 놓여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모두가 같지는 않았다. 누구는 싸웠고, 누구는 빌붙었고, 또 누구는 침묵했다. 정의로움과 기회주의가 공존하던 시절, 지도층을 바라보던 민초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하고 어떤 삶을 선택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을까. ‘조금만 비굴하면 삶이 편해진다’던 한 개그맨의 우스개 같지 않은 우스개가 슬프다. 개탄할 일은 더 있다. 어떤 이는 압제의 사슬에서 풀려났음에도 감당할 수 없는 자유의 무게감에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에리히 프롬은 그것을 ‘자유로부터의 도피’라 했던가.

‘돈 워리(Don’t worry)’ 이 한마디로 ‘천만 관객’을 돌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천만 가슴’에 새겨진 것은 단연 ‘돈 워리’ 그 한마디였다. 영화 ‘택시 운전사’는 그렇게 정의(正義)를 향한 험로(險路)에 “돈 워리”라고 외치고 있었다. 37년 전 5·18 광주항쟁을 다룬 영화는 기자(記者)와 기사(技士·운전사)의 버디무비 형식을 띠고 있다. 기사(技士)는 기자를 통해 사실에 눈을 뜨게 되고, 기자는 기사(技士)를 통해 사실에 다가갈 수 있었다. 이질적인 두 사람이 동행을 통해 서로 동화될 수 있었던 것은 압제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그저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 선량한 마음씨가 있었을 뿐이다. 자사 이익과 권력, 자본을 위해 글을 쓰는, ‘기레기’로 대표되는 요즘 언론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TV뉴스에 영화를 막 관람하고 나온 관객의 인터뷰가 나온다. “당시 (군부가) 그렇게까지 했는 줄 몰랐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돼 가슴 아팠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록 영상을 본 이들에게 ‘택시 운전사’는 그리 놀랄 내용은 아니지만 미처 보지도, 알지도 못했고 무관심했던 이들에게는 영화가 주는 감동에 앞서 충격이 더 컸다. 며칠 전 영화관 한쪽 나란히 앉아 있던 나이 지긋한 관객을 떠올려 본다. 보수 성향의 관객 입장에서는 그렇게 부정하고 싶었던 사실이 스크린에서 구현되고 있음에 적잖이 당황했을 듯하다. 그들에겐 ‘불편한 진실’이었을는지 모른다. 일부는 ‘송강호’(영화배우)만 보고 ‘김사복’(극중 택시 운전사로 나오는 실존 인물)을 외면하는 편리한 감상론을 펼쳤다. 그것도 선택이리라.

안동에는 압제에 저항한 상징적 인물이 있다. 1910년 8월29일 나라 주권을 빼앗기자(경술국치), 한순간도 오랑캐 땅에서 살 수 없다며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떠난 석주 이상룡 선생이다. 그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팔아버린 생가가 바로 아흔아홉 칸 임청각(臨淸閣)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징하는 공간이라 극찬했으며, 또 일제에 의해 반토막난 채 80년 가까이 방치돼 온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후배 기자가 묻는다. 선배가 일제 강점기에 살았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냐고. 석주와 같은 삶을 살 수 있었겠냐고. 자신 없다 했다. 속으론 친일·부일만 하지 않아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었던 게 바로 석주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유난히 더웠던 이번 여름, 우리는 세 개의 ‘양심’을 만났다. 나라를 빼앗기자 집을 버렸던 투사, 진실을 알리려 목숨 걸고 취재에 나선 기자, 그리고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 평범하지만 위대한 기사(技士)…. 암흑의 시대 목숨을 건 의로운 행동을 접하면서 한없는 부러움과 부끄러움을 갖게 된다. 그래서 임청각이 대통령 말 한마디에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오르는 일이 한때가 아니었으면, 택시 운전사 열풍이 지나간 아픈 역사에 대한 인스턴트 감성만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한 시인이 유난히 생각나는 2017년 8월이다.

변종현 경북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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