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칼럼] 성큼 다가선 천고마비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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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8-29   |  발행일 2017-08-29 제31면   |  수정 2017-08-29
[CEO 칼럼] 성큼 다가선 천고마비의 계절

뜨거웠던 폭염과 가뭄을 뒤로하고 입추(立秋)를 지나 처서(處暑) 이후 계절의 변화가 직접 느껴질 정도다. 조금 민감한 독자들이라면 눈치챘겠지만, 매미 소리가 잦아들고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조금 더 시간이 가면 코스모스가 산들산들 피어있는 옛 추억의 길을 떠올리며 걸을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가을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한여름의 고단함을 이겨내고 맞이하는 가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천고마비(天高馬肥)다.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초등학생도 다 아는 대중적인 고사성어다.

그러나 천고마비에 상실의 아픔과 수탈에 대한 경계의 의미가 담겨있음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흔히 말하는 ‘하늘은 높아지고 들판의 말이 살찌는 것’은 단순히 평화롭고 여유로운 주변 풍경의 변화를 묘사한 것이 아니었다.

천고마비의 어원은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의 한족(漢族)에게는 커다란 근심이 있었으니 바로 대륙의 머리 위를 압박하는 흉노족(匈奴族)의 존재였다. 시시때때로 변방을 넘어와 노략질을 일삼았지만, 특히 추수가 끝난 가을철의 침략과 수탈은 긴 겨울을 버텨야 하는 한족에게는 생존의 문제였다. 흉노족은 봄부터 여름까지 초원에서 유유자적하게 말들을 풀어 놓고 키운다. 가을이 오면 먹을 것이 부족한 겨울을 대비해 남쪽으로 쳐들어가 한족들이 땀 흘려 수확한 식량을 모조리 약탈해갔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자 열심히 일한 한족들의 입장에서는 여간 분하고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연유로 흉노족이 덩치 키운 말을 앞세워 메뚜기떼처럼 수확물을 수탈하러 오는 시기가 다가오면 북방을 경계하기 시작했고, 그때를 가리켜 ‘천고마비’라 한 것이다.

지금은 가을의 풍성한 결실과 아름다운 날씨를 나타내는 의미로 바뀌었지만, 수확이 끝나자마자 농기구를 내려놓고 다시 무기를 들어야 했던 한족의 오랜 아픔과 몸서리치는 두려움이 배어 있는 말이었다.

불로소득이나 남의 것을 빼앗아 축적한 부와는 달리 오랜 시간 공들여 힘겹게 얻은 것을 빼앗겼을 때의 슬픔과 분노는 가늠키 어렵다고 한다. 올여름 가뭄과 홍수로 농작물을 잃은 우리 농업인들의 상실감은 한족의 심정과 비슷할 것이다. 숱하게 흘린 땀방울의 결실을 잃었을 때, 다시 일어서기 힘들 만큼의 큰 좌절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고마비’는 농경의 긴 호흡이 몸에 배어 있는 한족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유목민족들의 침략과 약탈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는 북방민족의 약탈을 막아내기 위해 천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쌓아온 ‘만리장성’이 증명하고 있다. 위기에 맞서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토목사업을 진행하면서 한족들은 성(城) 자체보다는 상호 공고한 연대감과 국가 보호의 염원을 가시적으로 표출했을 것이다.

농경이 생업이었던 우리 민족 역시 예부터 밥상에 오르는 모든 음식을 소중히 생각했다. 부모 세대도 밥알 한 톨 허투루 버리는 법이 없었다. 논밭에 나가 직접 일을 하지 않아도 곡식 한 알에 담겨 있는 뜨거운 햇살과 땀 그리고 눈물을 알기 때문이다.

자연재해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온 농촌에 최근 발생한 달걀 파동은 더욱 시름을 안기고 있다. 그러나 흉노의 침략에 만리장성을 쌓아 대비했듯 우리 농축산업도 반드시 어려움을 극복함은 물론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할 것으로 본다. 한족이 단결했던 것처럼 우리 독자들도 우리 땅에서 생산된 먹거리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소비 촉진으로 주름진 우리 농업인들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를 수 있게 적극 실천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드린다. 이양호 (한국마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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