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시론] 말당 선생과 공범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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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8-30   |  발행일 2017-08-30 제31면   |  수정 2017-08-30
[영남시론] 말당 선생과 공범자들

미당(未堂) 서정주는 1980년대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말당(末堂)선생으로 통했다. 미당을 말당으로 부르게 된 것은 군사반란에 이어 광주를 피바다로 만든 쿠데타 세력의 수괴와 관련된 뜬소문 때문이다. 무력으로 권좌를 갈취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 비서들 앞에서 자신의 조예를 과시한답시고 청와대 집무실 서가에 장식용으로 꽂혀 있던 책 중에 미당 시집을 빼내들고 고개를 끄덕이며 “음! 말당 선생 어쩌구…” 했다는 것이다. 꾸며낸 이야기일 테지만, 국한문 혼용시대였던 80년대 한자의 오독은 그 사람의 지적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가늠자 역할을 했다. 미(未)와 말(末)은 글꼴이 비슷하여 혼동하기 쉬운 한자다. 미당이 대학생들 사이에서 말당으로 굳어지게 된 데는 잔인무도한 독재자에 대한 조롱과 함께, 미당의 친일행각뿐 아니라 쿠데타의 수괴에게 지지의사를 밝힌 역겨움도 한몫했으리라.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했던 정치군인들은 특히 문인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다. 끝내 탱크까지 동원하여 광주항쟁을 잠재운 그들은 곧바로 국보위를 설치하여 언론을 통폐합하고, 자신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잡지들을 폐간시키고, 저항하는 작가들은 모조리 옥에 가두어 버렸다. 이렇게 적막강산과도 같은 곳에서 ‘전(全)비어천가’만 요란한 가운데 5공은 출범했다. 그 지경에도 작가 두 사람이 또 보안사 취조실로 끌려갔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5공 초기, 일간지에 연재소설을 쓸 정도라면 적어도 권력의 눈 밖에 난 작가는 아니다. 그런데 ‘제복 입은 남자’들이 어쩌고 하는, 일간지 연재소설 속 한 문장이 제복 입은 깡패들에 불과했던 정치군인의 자격지심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끌려간 작가는 1970년대, 쇠락해가는 곡마단 곡예사들의 사랑과 슬픔을 담은 소설 ‘부초’로 인기작가의 반열에 오른 한수산이었고 또 한 사람은 시인 박정만이었다. 소설가 한수산은 단 한 줄의 문장이긴 하지만 그 살벌한 시국에 감히 ‘제복 입은 남자’들을 비아냥거린 원죄가 있다지만, 시인 박정만은 왜 끌려갔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두 작가는 초주검이 되어서야 겨우 풀려난다. 아무리 제복 입은 깡패들이라 할지라도 단 한 줄의 문장에 좌경용공이나 체제전복이라는 혐의를 덮어씌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 뒤 한수산은 망명객처럼 긴 세월 일본땅을 떠돌다가, 나가사키로 강제징용되는 바람에 핵폭탄에 피폭된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까마귀’와 최근 영화로도 제작된 소설 ‘군함도’를 들고 국내 독자들에게 되돌아왔다. 그러나 시인 박정만은 군홧발이 짓이겨놓은 자신의 영혼을 술로 어루만지다가 끝내 세상을 뜨고 만다. 1988년이다. 술병이 깊어서라기보다는 시인의 순수한 영혼을 피투성이로 만들어 놓았던 보안사의 사령관이 전두환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어 나타나는 세상에 절망한 탓이 아닐까. 그는 죽을 때까지 왜 자신이 끌려가서 그런 혹독한 고문을 당해야 했는지 이유를 몰랐다고 한다. 한수산 필화사건의 진상이 지금껏 제대로 규명된 적이 없으니 그 이유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자신의 친일행각에 대해 표현의 대가답게 친일이 아니라 ‘종천순일(從天順日)’, 즉 하늘의 뜻을 좇아 일본에 순종한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던 말당 선생! 그는 제복 입은 남자들의 깡패짓도 하늘의 뜻이라 여겼던 것 같다. 문인들의 붓과 지면을 빼앗는 것도 모자라 예술혼마저 군홧발로 짓이겨 놓은 쿠데타 세력의 수괴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축시를 바치는, 원로 문인으로서 차마 해서는 안 될 ‘말종’짓을 한다. 그 사이에 젊은 시인 박종만은 절명하고 만다. 무섭고도 슬픈 세월이었다.

영화 ‘공범자들’의 주연은 하늘의 뜻을 좇아 이명박근혜의 ‘박’에 순종함으로써 ‘잘들 살게 된, 종천순박파’ 언론인들이다. 그 가증스럽고 비굴한 얼굴들 사이에 그들이 길거리로 내쫓은 MBC 이용마 기자의 바짝 야윈 얼굴에서 피어나는 슬픈, 그러나 너무나도 환한 웃음이 절묘한 대비를 이룬다. 그는 지금 암투병 중이다. 살아있음을 부끄러워해야 하는, 참! 슬픈 세월이 너무 길다. 김진국 (신경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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