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걸 교수’의 오래된 미래 교육] 교육의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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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9-18 07:58  |  수정 2017-09-18 07:58  |  발행일 2017-09-18 제17면

섭공이 공자에게 말했다. “우리 동네에 스스로 정직한 자가 있으니 그의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이를 고발하였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우리 동네의 정직한 자는 이와 다릅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숨겨주고, 자식은 아버지를 위해 숨겨주니 정직함은 그 가운데 있습니다.”

‘맹자’ ‘진심장구 상’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맹자의 제자인 도응(桃應)이 물었다. “순임금이 천자가 되고 고요가 법을 집행할 때, 순임금의 아버지 고수가 살인을 저지르면 고요는 어떻게 할까요?” 맹자는 고요는 법을 집행할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도응은 다시 순임금은 아버지 고수가 처형당하는 것을 그대로 보고 있을 것인지 물었다. 그러자 맹자는 순임금은 몰래 아버지 고수를 업고 도망하여 멀리 바닷가에 거처하면서 종신토록 즐거워하며 천하를 잊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서구 근대공교육에서의 공(公)과 사(私)는 멀리 아테네의 오이코스(oikos)와 폴리스(polis)의 구분에서 비롯된다. 오이코스는 가족이 기거하는 물리적 공간을 의미하며 이것은 철저히 사적 원리에 의해 운영되었다. 반면 폴리스는 도시국가의 영역으로 철저히 공적 원리에 의거해 운영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이코스와 폴리스의 혼돈을 모든 병폐의 근원으로 간주하였다. 현대 문명 속에서도 이러한 공과 사의 구분이 적용된다. 즉 공적 영역에는 사적인 이해관계가 개입해서는 안 되고, 사적 영역에는 공권력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보편적인 원리이다.

그러나 위의 공자나 맹자의 주장에서 보듯이 유학의 공공성은 영역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유학의 공공성은 영역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내재된 도덕성에 의해 구분된다. 그래서 공자의 주장처럼 아버지가 아들을 숨겨주고, 아들이 아버지를 숨겨주는 것이 공이다. 왜냐하면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은 인간에 내재된 가장 근원적인 본성이기 때문이다. 정이천은 단도직입적으로 ‘인(仁)의 도(道)를 요약하건대 공(公) 한 글자’라고 하였다. 인은 천하의 공도(天下之公道)이고 천지가 만물을 낳은 마음(天地生物之心)이기 때문이다. 반면 본성이 아닌 사적 욕망에서 비롯된 것은 그것이 아무리 공적인 영역의 것이라고 해도 사(私)이다.

이런 기준으로 오늘날 우리의 공교육을 바라보면 어떨까? 공공이란 사익에 반대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국가나 학생 혹은 학부모 공히 사적인 이익을 위해 공교육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국가나 정권의 사적인 이해관계, 예컨대 유신정권과 같이 정당성 없는 정권의 정당성 창출을 위해 교육을 이용하거나, 일부 대학에서 실시하고 있는 주문형 교육과 같이 자본의 이익을 위해 자본이 요구하는 인력을 양성하는 것은 공의(公義)가 아니라 사익을 위한 교육이다. 수혜자의 입장에서도 공동체에 대한 자기 헌신을 전제로 하지 않고 개인의 출세와 영달을 위한 교육은 공교육이 아니다.

우리는 공교육을 논함에 있어 무엇이 평등이고 무엇이 불평등인지를 논의하는 것에 앞서 무엇이 사익이고 무엇이 공의인가를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 평등교육의 원리에 의거해 모든 국민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최대한 발현할 수 있도록 공평한 교육기회를 제공해야 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공의의 원리에 의거해 그러한 교육을 통해 기르고자 하는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인간이 공공의 정의를 위해 얼마나 헌신할 수 있는지를 고려하는 일이다. 교육의 공공성은 수요자 중심 교육에서 강요하는 이기심과 자기주장이 아니라, 공동체를 통한 자기극복과 공동체에의 헌신을 배우는 데서 찾아야 한다. <대구교대 교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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