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새롭게 주목받는 召文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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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9-18   |  발행일 2017-09-18 제30면   |  수정 2017-09-18
[기고] 새롭게 주목받는 召文國

역사서에 남아있는 조문국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삼국사기’는 “신라 벌휴왕 2년(185)에 조문국을 벌(伐)했다”, ‘고려사 지리지’는 “의성현은 본래 조문국인데 신라가 취했다. 경덕왕이 문소군으로 고쳤고 고려 초에 의성부로 승격했다”, 조선시대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조문국의 옛 터는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지금은 조문리라 부른다” 등이 전부다. 또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과 미수 허목의 ‘미수기언’에 “조문국에 경덕왕이 있었고 조문금(琴)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으나, 촌로(村老)의 이야기 또는 현몽(現夢)했다”는 식으로 대부분 짧거나 가볍게 다뤄지고 있다.

이렇듯 ‘누가 언제 나라를 세웠고, 또 어떤 이유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는지’ 등에 대해 명확한 기록을 남긴 조문국 역사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히 조문국은 주류 역사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고, 지역 일부 향토사학자들을 중심으로 관련 자료 수집과 연구를 통해 명맥을 이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상당한 성과도 있었지만 주류사학계의 관심에서 벗어난 지역사라는 한계에 봉착하면서 의성민들에게만 회자되는 ‘잊힌 왕국’으로, 한때는 기억 속에서 사라질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최초로 실시한 금성면 탑리 고분 발굴·조사 결과, 고구려 집안(集安) 출토 관식과 매우 유사한 금동관과 나비모양의 관장식 등 720여점이 출토되면서 분위기는 반전됐다. 특히 신라 수도였던 경주의 김씨 왕권을 상징하는 묘제로 신라의 거점지역에만 나타나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이 발굴됐다. 이 같은 고고학 자료를 통해 의성이 경주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이 학계에 알려졌다.

또 2010년 실시된 금성면 대리리 2호분 발굴·조사에서도 금동관과 함께 4~6세기 신라 왕족의 무덤양식인 적석목곽분이 대량으로 나타났다. 당시 신라에 병합된 다른 지역에서도 적석목곽분이 간혹 나타났지만 금성산고분군과 같이 대량으로 발견된 지역은 없었다. 따라서 당시 조문국은 신라의 중심부인 경주지역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경북 중심에 위치한 의성은 교통의 요충지이자 미천·위천·남대천과 낙동강 유역의 풍부한 용수를 차지하고 있어 한눈에도 고대사회의 중심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삼한시대 고대국가였던 조문국의 옛터인 금성면 대리·탑리·학미리 등에는 조문국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줄 단서인 370여기의 고분이 발굴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의성군은 2007년부터 최근까지 11회에 걸친 학술회의를 열고 수차례의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당시 출토된 유물들이 국립박물관과 대학박물관 등에 흩어져 보관 중인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에 지역민들은 2007년 고대 의성의 찬란했던 문화유산을 지역에서 보존 관리하기 위한 박물관 건립에 착수했다. 당시 학계·향토사학자·행정기관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이 뜻을 모아 설립한 ‘조문국유물되찾기 및 박물관건립추진 범군민연대회의’는 영남일보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으면서 ‘박물관 건립’과 ‘출토된 유물 제자리 찾기’ 운동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2만여명의 군민으로부터 지지서명을 이끌어냈고, 2013년 4월 지방의 소규모 박물관으로서는 드물게 연간 10만여명의 관람객이 찾아오는 의성조문국박물관을 개관하게 됐다. 김영한 (의성조문국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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