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曲기행 .4] 무이구곡도...朱子 삶·가르침 녹여낸 문화산수도…퇴계 이황도 감동해 눈물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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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9-21 07:55  |  수정 2021-07-06 14:56  |  발행일 2017-09-21 제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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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무이구곡도의 대표작인 이성길의 ‘무이구곡도’(부분). 문신인 이성길이 1592년에 그린 작품으로 길이 4m(세로 33.5㎝)에 이르는 두루마리 작품이다.

팔경(八景)을 그린 팔경도와 구곡(九曲)을 그린 구곡도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대표적 문화산수도 양식이다. 이 중 팔경도의 원류는 중국 후난성의 소수(瀟水)와 상수(湘水)가 합류하는 지역의 경치를 여덟 폭으로 그린 ‘소상팔경도’다. 북송의 이성(李成)이 처음으로 ‘소상팔경도’를 그렸다. 그리고 구곡도는 바로 주자의 무이구곡을 그린 ‘무이구곡도’가 시초다. 주자는 54세 되던 1183년 제자들과 함께 푸젠성 무이산의 무이구곡에 정사(精舍)를 짓고 은거하면서 성리학 연구와 저술 작업에 전념했다. 이 무이구곡은 원대(元代) 이후 주자 성리학의 발원지로서 또는 주자의 학통을 이은 후학들의 활동 공간으로 부상하게 되었고, 주자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한 상징물로서 무이구곡도가 활발히 제작되었다. 무이구곡의 산수를 그린 무이구곡도는 16세기 때 조선에 전래된 이후 구한말까지 약 400년 동안 꾸준히 그려진 그림이다. 여말선초에 전래된 주자의 성리학을 깊이 탐구한 16세기 유학자들에게 주자는 학문의 종주로 무한한 존경의 대상이 되었고, 주자의 삶과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본 무이구곡도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이후 큰 인기를 끌며 유행하였다. 특히 원본을 베껴 그린 모사본이 서울은 물론이고 지방의 지식인들에게도 널리 보급되었다. 당시 유학자들에게 무이구곡도는 단순히 풍경을 감상하기 위한 그림이 아니라 주자와 정서적 교감을 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주자 업적 상징물로 활발히 제작
16세기 조선 전래후 400년 유행
성리학 종주와 시공초월해 교감
聖地 동경한 선비들 애정도 각별
원본 베낀 모사본 지방까지 보급

조선말 대중적 취향 민화에 영향
상·하류층 모두 선호 그림 주제


◆조선 선비들이 애장한 무이구곡도

주자 성리학을 최고의 학문 가치로 여긴 조선 선비들의 무이구곡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각별했다. 요즘처럼 교통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무이구곡을 직접 답사할 수가 없었던 만큼, 무이구곡도를 구해 곁에 두고 보면서 주자의 삶과 가르침을 본받고자 하는 욕구는 더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6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무이구곡도의 초기 작품으로 대표적인 예는 이성길(李成吉)의 1592년 작 ‘무이구곡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다. 두루마리로 된 이 그림(가로 4m)에는 화면 전체에 걸쳐 무이구곡의 아홉 굽이가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화면 구성은 무이구곡의 경관적 특성과 두루마리 그림의 기능에 맞춘 것이다. 화면에서 각 곡의 명칭은 기록하지 않았지만, 각 곡마다의 특징적인 경관을 일정한 간격으로 화면 안에 배치해 그린 것이 특징이다.

이성길의 무이구곡도와 함께 대표적인 무이구곡도로 영남대 박물관의 ‘주문공무이구곡도(朱文公武夷九曲圖)’를 들 수 있다. 주문공은 주자를 말한다. 16세기 중국에서 전래된 무이구곡도를 지방 화공이 모사한 것으로, 퇴계 이황의 친필 발문이 있어 이황이 그림의 소유자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퇴계 이황이 이 그림을 보며 눈물을 글썽일 정도로 감동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원본 모사를 거듭함에 따라 원래 그림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작품이다.

또한 안동의 학봉 김성일(1538~1593) 종택이 소장하고 있는 ‘무이구곡지도’ 역시 눈길을 끈다. 무이구곡의 전체 경관을 한 화면에 담은 총도 형식의 구곡도이다. 김성일이 1577년 종사관으로 연경에 갔다올 때 ‘무이구곡도’를 가져왔다고 전해진다. 당시 조선인 화가가 그 원본을 모사한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그림은 보기드문 16세기 무이구곡도 중 하나다.

무이구곡도 감상층이 점차 확산되면서 18세기 이후에는 무이구곡도를 그리는 사람들도 화원 화가와 문인 화가, 그리고 무명 화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확산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강세황(1713~1791)의 무이구곡도(25.5㎝X406.8㎝)와 영남대 박물관의 계병(契屛) ‘무이구곡도’다. 계병은 나라의 큰 행사를 기념해 만든 병풍이다.

강세황이 그린 무이구곡도는 당시에 전하던 두루마리 형식의 무이구곡도를 간략한 선묘 위주로 베껴 그린 그림이다. 문인화 취향의 분위기가 간결하고도 함축적인 선묘에 잘 나타나 있다. 영남대 박물관의 계병 무이구곡도는 8폭을 연이어 그린 것으로 1739년 중종비 단경(端敬) 왕후 신씨의 복위로 인해 능을 단장하는 일을 맡은 도감의 관원들이 기념물로 만든 것이다. 이 두 점의 무이구곡도는 화원 화가들의 공력이 담긴 그림과 문인들의 취향이 담긴 그림으로서 화원화와 문인화의 대비를 잘 보여준다. 18세기 전반에는 이처럼 표현 방법이 다채로운 무이구곡도가 널리 그려졌다.

한편 성주의 선비인 응와 이원조(1792∼1871)는 1862년 무이구곡도와 함께 무이구곡과 관련 있는 선인들의 글을 엮은 첩인 ‘무이도지(武夷圖誌)’를 만들었다. 무이구곡도와 함께 이황, 정구, 정종로가 쓴 무이구곡 차운시와 이상정의 구곡도 발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무이구곡도에는 주자의 ‘무이도가’도 담겨 있다. 주자와 무이구곡에 대한 동경심을 읽을 수 있다.

◆민화로 확산된 무이구곡도

조선 말기의 무이구곡도는 대중화의 단계를 거치면서 민화로까지 확산된다. 그러면서 뚜렷한 양식 변모를 보인다. 무이구곡도는 18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전통 형식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그림으로도 그려져 대중의 수요와 접목되었고, 이후 상상력이 가미된 민화로 그려졌다. 원래 유학자나 양반들 사이에서 감상되던 무이구곡도가 민간양식으로 그려져 민화의 저변을 넓히는 소재로 다루어진 점은 매우 의외의 현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무이구곡도의 민화화는 변화하는 시대 환경, 새로운 수요층의 등장과 수요에 따른 민간 양식의 그림 생산 등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1785년에 그린 무이구곡도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은 무이구곡의 주요 경물을 의인화 내지 의물화하고 있다. 예컨대 제2곡의 중심 경물인 옥녀봉은 한복을 차려입고 서 있는 여인의 모습을 그렸다. 옥녀봉이 미인을 상징한다는 의미를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인의 형상으로 의인화한 것이다. 단연 감상자의 시선을 흥미롭게 사로잡는 요소다. 무이구곡도가 지식이 있어야만 보는 어려운 그림이 아니라 누구나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는 그림인 점을 강조한 파격적인 구성이다.

가회민화박물관 소장의 10폭 무이구곡도병은 상상의 경관과 조형성을 강조한 민화풍의 그림이다. 이 병풍 그림은 각 폭마다 대부분 비슷한 구도와 필치로 그려져 있다. 특히 무이구곡의 고유한 지형적 특징은 거의 반영되지 않았고, 상상으로 그린 부분들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산의 굴곡을 비슷한 간격의 반복되는 운필로 표현했다. 경물 묘사에 원근의 차이가 없지만, 전통화법에 구애받지 않는 조형적 표현이 신선하다. 여기에 적힌 주자의 무이구곡시가 이 그림이 무이구곡도임을 알려 주는 단서다.

이처럼 무이구곡도는 대중적 취향을 담은 민화로도 그려짐으로써 상류층부터 중서민층에 이르기까지 가장 폭넓은 계층을 대상으로 한 그림의 주제가 되었다. 그리고 무이구곡도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중국 도상을 한국적인 화풍으로 전환해 낸 사례로, 중국문화의 수용과 한국화라는 측면에서 우리나라 문화사에서 시사하는 의미도 매우 크다.

물론 무이구곡도는 조선의 선비들이 설정해 경영한 곳곳의 구곡을 담은 다양한 조선 구곡도로 전개·발전되어 갔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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