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父子 교정위원 조중래·조대식씨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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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9-22 08:07  |  수정 2017-09-22 08:08  |  발행일 2017-09-22 제21면
“재소자 자녀들이 무슨 죄…사회가 새 삶 여지 줘야”
20170922
조중래 대원상사 대표(아래)와 그의 아들 대식씨는 부자(父子) 교정위원이다. 각각 안동교도소와 대구구치소에서 재소자의 재활과 자립을 돕고 있다. 지난 18일 부자가 함께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며 미소 짓고 있다.

“어릴 때 이삿짐을 옮기다 종이뭉치가 툭 떨어지길래 주워 읽어봤죠. 어떤 재소자가 아버지께 쓴 편지였는데, 돈을 잘 받았다는 감사의 글이었어요. 선행은 돈 있는 사람만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때 ‘우리 아버지가 이렇게 훌륭한 분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조대식 대구구치소 교정위원(38)은 그의 아버지 조중래 <주>대원상사 대표(65·안동교도소 교정위원)와 함께 부자(父子) 교정위원이다. 대식씨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4년전 자발적으로 교정위원이 됐다.

조중래 대표는 지난달 안동교도소 내 모범수형자 20명과 수형자 자녀에게 총 270만원의 생활지원금과 장학금을 전했다. 그는 1993년부터 25년째 매년 2월과 8월 모범수형자들에게 장학금과 생활지원금을 전해오고 있다. 지금까지 47회에 걸쳐 총 357명에게 6천285만원을 지급했다. 이뿐만 아니다. 그는 출소한 재소자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고, 자신의 공장(옛 대남직물)에 30명 가까이 취직시켜 새 삶을 살아가도록 힘을 보탰다.


아버지 조중래씨
가난 인한 범죄 대물림 막아야
25년간 모범수 357명에 지원금
직접 고용해 사회 적응 돕기도
‘돈 벌면 사회 환원하라’ 당부

아들 조대식씨
남한테만 베푸는 것 한땐 원망
재소자 감사편지 읽고 父 존경



조 대표가 수형자에게 이처럼 관심과 애정을 쏟는 이유는 뭘까.

“1987년에 아는 사람이 출소자의 취업을 부탁하기에 들어줬습니다. 하지만 3개월이 못 돼 나갔어요. 그 뒤로 몇 명을 고용했는데 재활하는 모습을 보니 보람이 생기더군요. 이듬해 출소자들이 자립할 때까지 숙식과 편의를 제공하고 취업을 알선하기 위해 갱생보호공단(현 한국법무복지공단) 대구지부를 창립했지요. 20명이 발기를 했는데 저도 들어갔습니다.”

그는 안동교도소 측으로부터 교정위원 위촉을 여러번 제의받았지만 고사하다 2005년에 하게 됐다.

“한때의 범죄로 전과자가 됐지만 그 자녀들이 무슨 죄가 있나요. 출소자는 물론 가족의 나머지 인생을 망치게 해선 안 되죠. 범죄는 항상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고, 누구에게나 노출될 수 있습니다. 우리사회가 그들이 재활할 수 있도록 보듬고 챙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 대표는 착한 일을 하면 반드시 자신에게 좋은 일이 생긴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IMF 외환위기로 회사가 부도 위기에 처해 신용불량자가 됐을 때도 장학금을 기탁했다. 대식씨는 한때 그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경차나 트럭만 탔습니다. 남에겐 한없이 베풀지만 자신과 가족에겐 엄격했습니다. 어머니가 힘들게 일하는 걸 보고 원망도 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아버지의 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교정위원을 하게 됐습니다. 아버지는 ‘좋은 차 타고 다니면 뭐하노. 좋은 일 하는데 하나도 안 부럽다’고 해요. 제가 보다 못해 4년 전 새 차를 구입해드렸습니다.”

그런 조 대표도 나름의 후원 원칙이 있다.

“가정파괴범은 추천받지 않습니다. 또 지원금을 줄 때 ‘거저 주는 게 아니다. 돈을 벌면 반드시 자신보다 형편이 어려운 두 사람에게 갚아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편지하지 말아달라는 부탁도 덧붙입니다. 경험상 출소자가 결혼을 하면 90% 이상 재범하지 않습니다. 취업을 시켜보면 잡범보다 5년 이상 장기수가 사회적응률이 높고 성실합니다.”

조 대표는 4형제 중 장남으로 달성군 가창면이 고향이다. 8세 때 태풍 사라호로 아버지를 여의고 가족은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을 했다.

“도시락은커녕 굶는 날이 부지기수였지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바로 직물공장에 들어갔습니다. 어머니가 시장에서 좌판을 열고 형제를 키웠어요. 20대 초반에 직기 4대를 사서 독립했습니다. 옛날 수성극장 인근에 있었는데 가족이 다 달라붙어 일했죠. 이후 당시 이현공단(서대구산단)에 갔다 85년에 경산에 공장을 세우고 기능성원사를 만들었습니다. 한때 직원이 80명이나 될 정도로 번창했습니다. 중국제품이 밀려들어 이젠 경쟁력이 없어요. 작은 아들(대식씨)이 많이 돕고 있습니다. 저도 이젠 물러나야지요.”

조 대표는 최근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졸업했다. 초등학교 졸업장만 있던 그의 아내는 지난해 대학을 나왔다. 그도 내년에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다.

“가난으로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게 늘 한으로 남아있었지요. 재소자의 자녀들 또한 부모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건 마찬가지예요. 아이들을 잘 보살펴 범죄를 대물림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게 복을 짓는 일 아니겠습니까.”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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