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러시아 블라디미르와 수즈달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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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9-22   |  발행일 2017-09-22 제37면   |  수정 2017-09-22
목조교회와 황금·코발트빛 돔…“동화 속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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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펜스키 성당. 왼쪽의 삐죽한 건물이 종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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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즈달 카멘카 강 건너편에서 바라본 로제스트벤스키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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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스코화로 장식된 스파소 에프피미에프 수도원 성당 내부. 수도사들이 성가를 합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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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즈달 목조건축박물관의 목조교회.

모스크바 북동부 근교의 소위 ‘황금고리(Golden Ring)’ 고도(古都)들이야말로 러시아의 역사와 정신을 대표하는 문화유적지다. 그 가운데 블라디미르와 수즈달은 ‘블라디미르와 수즈달의 백색 기념물군’이라는 이름으로 1992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선정된 도시들이다. 블라디미르주의 중심도시인 블라디미르는 인구가 30만명이 넘는 도시로서 수도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180㎞ 정도 떨어져 있으며, 1만여 명의 인구를 가진 소도시 수즈달은 블라디미르에서 30㎞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12세기에서 13세기에 걸친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국 시기의 빛나는 문화유산이 집적된 이 두 도시는 중세 러시아의 건축 양식과 예술의 발전과정을 실증하는 곳으로, 러시아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모스크바 북동부 근교 ‘황금고리’ 古都
12~13세기 성당 등 흰 석회암 건물 집적
1992년 세계유산 선정 ‘백색기념물군’
중세 ‘러’ 건축과 예술 발전과정 실증

‘언어장벽’ 우여곡절 끝에 렌터카 인수
모스크바서 3시간 거리의 블라디미르
공사·정체로 7시간이나 걸려 생고생
황금의 문·우스펜스키 성당 등에 이어
이튿날 50여 교회·수도원 수즈달 관광
강변 흙으로 쌓아올린 크렘린 등 독특


아직도 러시아 여행은 예측불가한 일이 심심찮게 일어난다. 특히 러시아의 첫 여행지 모스크바에서 ‘말이 안 통해도 돈 버는 것이 문제이지, 돈 쓰는 것(여행)은 문제 없다’는 나의 여행관을 무색하게 만드는 경험이 여러 번 있었다. 그래서 렌터카로 황금고리 고도를 둘러보는 여행도 내심 걱정이 많았다. 그 걱정은 자동차를 렌트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숙소와 가장 가까운 벨로루스키 역 지점에서 자동차를 픽업하기로 예약했지만 역 주변을 아무리 찾아봐도 렌터카 사무실이 보이지 않는다. 계약서를 다시 확인해보니 전화로 접선하란다. 한참만에야 나온 직원은 더 황당한 말을 한다. 우리가 예약한 7인승 차가 어제 사고가 나서 지금 없단다. 그래서 4인승 두 대를 가져가란다. 게다가 미리 신청한 내비게이션도 없단다. 운전자가 한 사람밖에 없다며 7인승을 구해달라고 했더니, 운전사 한 명도 딸려주겠단다. 우리가 지금 1박2일로 블라디미르를 비롯한 황금고리 도시로 갈 거라고 하자 그 직원 역시 당황하는 표정이다. 다시 보스에게 전화를 걸더니 차량을 구해줄 테니 조금 기다려 달란다. 결국 오전 9시에 픽업하기로 한 차량을 12시가 되어서야 받을 수 있었다. 그래도 리턴 시간 연장에다 연료탱크를 안 채우고 반납하는 등의 보상을 제시하여 금방 마음이 누그러졌다.

오랜만에 운전하는 수동차량에다 복잡한 모스크바 거리 때문에 운전의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더 곤혹스러운 것은 공사 때문인지 차로가 사라진 곳이 많다는 것이었다. 조심조심 시내를 벗어나 교외로 접어들자 조금 긴장이 풀렸다. 주유소에서 햄버거로 점심을 때우고 한적한 시골 국도를 신나게 달린다. 주위 경관을 즐기며 자동차 여행의 우쭐한 즐거움이 생겨날 즈음에 차량 정체가 시작되었다. 예정대로라면 벌써 첫 목적지인 블라디미르에 도착했을 오후 3시를 훌쩍 넘었다. 그러고도 4시간이나 더 걸렸으니, 200여㎞ 되는 거리를 7시간 넘게 걸린 셈이다. 블라디미르의 아름다운 풍광이 아니었다면 진짜 우울할 뻔했는데, 이 도시는 모스크바에서의 여러 기억을 말끔히 지울 정도로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블라디미르는 키예프 공국에 이어 한때 러시아의 수도였던 천년 고도이다. 블라디미르의 역사는 1108년 키예프 러스의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공이 이 지역에 요새를 세운 것에서 시작된다. 12세기에는 로스토프나 수즈달을 중심으로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국이 확립되었고, 내분과 유목민 침입 때문에 키예프의 세력이 약해지자 블라디미르가 루스의 수도가 되었으며,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1238년 몽골 침입으로 마을은 파괴되었고, 250년간이나 계속된 소위 ‘타타르의 멍에’ 하에서 더욱 세력을 잃으면서 신흥의 모스크바에 밀렸다.

블라디미르 관광은 출입구 역할을 하는 ‘황금의 문’에서부터 시작된다. 황금의 문은 1158년에서 1164년 사이에 만들어진 성문으로 블라디미르 성벽에는 원래 5개의 바깥문과 2개의 안문이 있었지만 현재는 이 문만 남아있다. 메인스트리트를 내려다보는 문의 위쪽은 교회였지만 지금은 전쟁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황금의 문 앞쪽에는 또 붉은 벽돌로 만들어 ‘붉은 교회’라고 부르는 트리니티교회가 있는데, 로마노프 황실 300주년을 기념해서 건축했다.

블라디미르에서 단연 돋보이는 건축물은 1160년에 건축된 우스펜스키 성당이다. 언덕에 자리를 잡은 이 성당은 14세기 초반까지 러시아 최고 자리에 있었던 대성당이다. 이 지역에서만 나는 흰 석회암을 사용하여 건물 전체가 흰색인데, 거기에 5개의 황금빛 돔을 올려 조화를 이루고 있다. 교회 내부의 벽면은 아름다운 프레스코화로 덮여있으며, 교회 중앙의 천장 아치에는 러시아 성상화의 대부 안드레이 루블레프가 그린 ‘최후의 심판’이 있다. 모스크바 크렘린 궁의 우스펜스키 성당도 이 성당을 모델로 했다. 1197년에 건립된 드미트리예프스키 성당도 동일한 건축양식을 보여주는데, 외벽의 한쪽 면을 멋진 부조로 장식하였다. 우스펜스키 성당 앞의 푸시킨 공원과 드미트리예프스키 성당 옆의 역사박물관도 둘러볼 만하다. 해질 무렵 공원을 거닐면서 마주한 이 건축물들은 석양에 물든 흰 벽체의 오묘한 빛으로 인해 더욱 신비로웠다. 언덕 아래 펼쳐진 옛 키예프 공국의 전원 풍경을 실컷 담고 어둑해져서야 숙소인 수즈달로 향했다.

수즈달의 풍경은 시골스러웠다. 우리의 숙소도 외관 전체를 굵은 통나무로 마감한 것이 꼭 시골 별장 같다. 천장까지 굵은 자작나무로 마감을 한 룸에 모양과 크기가 다 다른 침대보와 베개, 연필과 지우개가 놓인 필통, 넓은 창, 창 아래 오밀조밀한 화단까지. 부담스럽지 않은 편안함에 모처럼 긴장 없는 잠을 잤던가 보다. 오전 6시에 눈이 뜨였다. 가랑비 뿌리는 창 밖 풍경은 우리를 자꾸 불러낸다. 인적 없는 마을 거리를 나서니 어제 저녁 어둠이 감춰두었던 찬란한 풍광이 펼쳐진다. 마을 앞의 목조 교회와 어우러지는 카멘카 강 너머의 선명한 코발트빛 둥근 돔이 동화 속 그림 같다.

수즈달은 도시 전체가 역사박물관이라고 할 정도로 수많은 교회와 수도원이 있다. 수즈달이 러시아 연대기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024년으로 블라디미르보다 100년 정도 앞선다. 12세기 전반, 키예프 대공 유리 돌고루키 시대에 로스토프 수즈달 공국(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국의 전신)의 수도가 되었다. 15세기에 모스크바 대공국의 지배를 받고부터는 러시아정교회의 중심지가 되었고,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많은 교회가 세워졌는데 당시의 모습이 거의 그대로 유지돼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드는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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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즈달의 대표적 관광지인 크렘린도 도시처럼 소박하다. 11세기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함께 만들어진 크렘린은 카멘카 강의 완곡을 따라 흙으로 쌓아올려 여느 도시의 그것과는 달리 위압적인 모습이 없다. 아침 산책 때 눈길을 붙잡았던 크렘린 중심부의 눈부신 파란 돔은 1225년에 건립된 로제스트벤스키 대성당으로, 수즈달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흰 돌에 부조를 한 아랫부분이 13세기의 것이고, 상부는 16세기에 다시 세운 것이다. 성당 내부는 13세기부터 17세기에 걸쳐 그려진 프레스코화와 이콘들로 덮여있다.

크렘린을 나와 천천히 마을길을 드라이브한다. 마음가는 대로 가다 섰다를 반복하는 여유로움 끝에 닿은 곳이 스파소 에프피미에프 수도원이다. 마을 북쪽을 수호하고자 메칸가 강 좌측에 성벽을 돌려 만든 이 수도원은 1352년에 건립되었다. 12개의 탑에다 높이 8m, 길이 1.5㎞의 위용을 자랑하는 요새지 형태의 이 수도원에는 소비에트 시절까지 운영했던 감옥시설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이 수도원이 오히려 크렘린 같다. 그렇지만 수도원 내부의 천장과 벽은 화려한 17세기 프레스코화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수즈달에는 이외에도 50여 개의 교회와 수도원이 있다. 모두 나름의 이름과 역사가 있을 터이다. 그러나 시간이 멈춘 듯한 이 공간에서는 묻지 말고 따지지도 말 일이다. 작은 하천과 초원을 배경으로 펼쳐진 소담한 마을과 교회, 참으로 회화적인 이런 풍경이 러시아의 본래 모습이 아니었을까. 대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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