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이라 밤 하늘에
달은 높이 현 등불 다호라
임하 호올로 가오신 임하
이 몸은 어찌호라 외오 두고
너만 혼자 훌훌히 가오신고
아으 피 맺힌 내 마음
피리나 불어 설운 이 밤 새오리
숨어서 밤에 우는 두견이처럼
나는야 밤이 좋아 달밤이 좋아
이런 밤이사 꿈처럼 오는 이들…
달을 품고 울던 벨레이느
어둠을 안고 간 에세이닌
찬 구들 베고 간 눈 감은 고월(古月), 상화(尙火)…
낮으란 게인양 엎디어 살고
밤으란 일어 이렇게 피리나 불고지나
어두운 밤의 장막 뒤에 달을 벗 삼아
임이 끼쳐 주신 보밸랑 고이 간직하고
피리나 불어 설운 이 밤 새오리
다섯 손꾸락 사뿐 감아 쥐고
살포시 혀를 대어 한 가락 불면
은쟁반에 구슬 구을리는 소리
슬피 울어 예는 여울물 소리
왕대숲에 금바람 이는 소리…
아으 비로소 나는 깨달았노라
서투른 나의 피리 소리언정
그 소리 가락 가락 온 누리에 퍼지어
붉은 피 방울방울 돌면 찢기고 흩어진 마음 다시 엉기리 (-윤곤강, ‘피리’)
1980년대 초, 오빠 친구들은 군사정권의 과외 금지법에 따라 월부 책 외판원을 했습니다. 시쳇말로 ‘핵꿀 알바’에서 하루아침에 내몰리자 맨 처음 택한 아르바이트였던 셈입니다. 윤곤강 시인(1911~1950)의 ‘피리’는 그때 구입한 ‘한국의 명시 낭송집’에 실렸던 시입니다. 그 낭송집 중 윤곤강의 ‘피리’는 유일하게 몽롱한 꿈을 꾸듯 녹음기 덱을 수없이 여닫으며 되돌려 들었던 시입니다. ‘달을 품고 울던 벨레이느’는 ‘달빛’ 등의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에게 영감을 준 시인 폴 베를렌이며, ‘어둠을 안고 간 에세이닌’은 러시아의 시인이자 이사도라 덩컨의 어린 남편 세르게이 예세닌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습니다. 아, 윤곤강 시인이 카프(KAPF) 회원으로 일제에 의해 옥고를 치렀다는 사실도 함께 말입니다. ‘찬 구들 베고 간 눈 감은 고월(古月), 상화(尙火)’는 우리 대구의 이장희, 이상화 시인입니다. 그때 저는 막연했지만 시는 운율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나중에 시를 쓰면서 거듭 소리 내어 읽으며 퇴고를 하는 습관이 붙은 것도 이 시 덕분이랍니다.
박미영<시인·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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