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공포마케팅

  • 허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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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9-25   |  발행일 2017-09-25 제31면   |  수정 2017-09-25
[월요칼럼] 공포마케팅
허석윤 논설위원

대부분의 여성이 ‘털과의 전쟁’을 벌인다. 면도기로 깎거나 족집게로 뽑는 것은 기본이고 제모 크림을 바르거나 아예 레이저로 모근을 지지기도 한다. 특히 겨드랑이 털은 남에게 혐오감을 준다는 생각에 더욱 철저히 제거한다. 하지만 요즘 들어 ‘겨털’ 제거에 반기를 드는 여성이 늘고 있다. 특히 마돈나 같은 월드 스타들은 SNS에 자신의 겨털 염색 인증샷을 올려 자랑(?)까지 하고 있다. 물론 그들이 별난 구석은 있지만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성의 겨털을 수치스러워하는 문화는 기업 마케팅의 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100여년 전만 하더라도 여성은 겨털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1915년 미국 면도기회사 질레트가 여성전용 면도기를 출시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당시 질레트는 대대적인 광고를 통해 매끈한 겨드랑이가 미의 기준이라고 주장했다. 즉 겨털이 있으면 여성스럽지 않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인데 이게 제대로 먹혔다. 그때부터 미국 여성 사이에선 겨털 밀기가 대유행이 됐고, 차츰 전세계 여성의 에티켓으로 자리 잡았다. 질레트가 대박을 친 것은 여성에게 겨털이 있으면 추하게 보일 것이라는 두려움을 심어준 덕분인데, 이는 공포마케팅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공포마케팅이란 말 그대로 사람들의 신체적 혹은 사회적 공포감을 자극해 물건을 팔아먹는 상술이다. 입냄새를 없애라는 구강청결제에서부터 질병과 사고, 비참한 노후에 대비하라는 각종 보험상품에 이르기까지 그 사례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다. 공포마케팅의 외연을 좀 더 확장하면, 사람들에게 겁을 줘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까지를 아우를 수 있다. 이는 공익광고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정부의 금연광고가 대표적이다. 흡연자가 담배를 사면서 “폐암 하나 주세요” “후두암 하나 주세요”라고 말하는 광고는 섬뜩할 정도로 자극적이다. 또한 담뱃갑의 흉측한 금연 경고 그림은 공포감을 넘어 혐오감까지 준다. 보기에 따라서는 너무나 원색적이고 불쾌한 공포마케팅이지만 공익을 위한 것이란 명분으로 용인되고 있다.

하지만 일부 공익광고를 제외한 대부분의 공포마케팅은 의도가 불순하거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 마련인데 정치에 악용되면 더욱 그렇다. 특히 과거 군사정권이나 보수정권들의 공포마케팅은 무지막지했다. 그들은 권력유지를 위해 틈만 나면 좌파, 종북, 빨갱이 타령을 하면서 국민을 겁박했다. 그리고 선거 때만 되면 ‘북풍’을 일으켜 재미를 봤다. 북한을 공포마케팅 도구로 사골처럼 우려먹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 가짜가 아닌 진짜 엄청난 북풍이 휘몰아치고 있다. 알다시피 그 진원지는 북한이다. 김정은은 핵과 미사일로 미국을 상대로 맞짱을 뜨면서 위협 수위를 최고조로 끌어 올리고 있다. ‘너 죽고 나 죽자’식 공포마케팅을 하는 셈인데, 이에 뒤질세라 미국도 초강경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트럼프는 대북 선제타격론을 흘리다가 급기야 며칠전 UN총회 연설에서 북한을 ‘완전파괴’ 하겠다며 으름장을 놨다. 이에 격앙된 김정은은 트럼프를 ‘노망난 늙은이’라고 욕하며 태평양상에서 역대급 수소폭탄 실험을 하겠다고 맞받아쳤다. 그러자 또 발끈한 트럼프는 ‘미치광이 로켓맨’인 김정은을 절대 가만 놔두지 않겠다고 했다.

이처럼 양측이 말폭탄을 쏟아내며 일촉즉발의 ‘치킨게임’을 벌이지만 정작 최대 피해자는 그들이 아닌 우리라는 게 문제다. 중간에 끼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만 앓고 있는 처지가 딱하다.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다. 언제까지 우리는 북한과 미국, 심지어 중국 눈치까지 보면서 불안에 떨어야 하는가. 정부는 제재와 대화로 북핵문제를 푼다지만 현실성이 너무 낮다. 대한민국이 북핵 공포마케팅에 시쳇말로 ‘호갱’이 되지 않으려면 달리 방법이 없다. 핵에는 핵으로 맞서는 ‘공포의 균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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