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 토크] 영화 ‘아이 캔 스피크’ 감독 김현석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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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9-29   |  발행일 2017-09-29 제43면   |  수정 2017-09-29
“위안부 문제, 그동안 외면·방관…사죄하는 마음으로 만들었다”
20170929

‘아이 캔 스피크’가 추석 직전 극장가에 강력한 복병으로 등장했지만 이같은 흥행을 예측한 이는 많지 않다. 연출을 맡은 김현석 감독조차 출사표는 소박했다. “기대작은 아니어서 손익분기점(200만명)만 넘었으면 좋겠다”고 조심스럽게 피력했을 정도다. 하지만 그의 소박한 바람을 관객들은 뜨거운 관심과 호응으로 화답했다. 개봉과 동시에 국내외 기대작들을 가볍게 누르며 단박에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했으니 “얼떨떨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법도 하다.

2002년 ‘YMCA야구단’으로 입봉한 이후 ‘광식이 동생 광태’(2005), ‘스카우트’(2007), ‘시라노 프로젝트’(2010), 그리고 전작인 ‘쎄시봉’(2016)에 이르기까지 장르영화의 공식을 관성적으로 따르는 대신 우직하게 자신만의 감성화법으로 끊임없이 변주를 해왔던 김현석 감독이다. 그가 이번에도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정서, 그리고 경쾌한 유머감각을 잃지 않은 ‘김현석 표’로 관객을 찾았다.


영화 ‘YMCA야구단’서 ‘쎄시봉’까지
휴먼 코미디의 다양한 변주를 선뵌 감독
과거의 참상 보여주는 기존 영화와 달리
피해자의 현재를 휴먼 코미디로 녹여내
위안부 문제에 우회적으로 접근‘차별화’

“시나리오 보자마자 떠오른 배우 나문희
평범·유쾌함서 더 큰 공감과 울림 선사
우리 모두 알아야 할 위안부 문제의 현재
‘가만히 있지 말자’ 메시지 전해졌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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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캔 스피크’는 민원 건수만 무려 8천건, 구청의 블랙리스트 1호인 할매 옥분(나문희 분)과 원칙주의자 9급 공무원 민재(이제훈)의 이야기를 다뤘다. 시나리오 작가 출신답게 오리지널리티를 추구하는 김현석 감독이 시나리오 공모전 당선작인 ‘아이 캔 스피크’를 선택한 건 극히 이례적. 그는 “거부할 수 없는 강한 끌림을 느꼈다”고 말했다. “아무 정보 없이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는 ‘그냥 휴먼코미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중후반으로 넘어가면서 일본군 위안부 내용이 나오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어요.”

김현석 감독은 아직 끝나지 않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피해자 할머니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방관했던 자신을 포함해, 모든 사람이 옥분을 보며 조금 더 이 문제에 진심으로 다가가길 바랐다. 과거의 아픔과 처절한 실상을 보여주는 대신 당당함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옥분의 현재를 보여줌으로써 그와 주변인들의 진심이 변화시킬 미래에 집중했다. 다행히 “서로가 이해하고 변화하며 하나가 되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는 감독의 연출의도는 시나브로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사죄하는 마음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그의 진심이 통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무겁고 민감할 수 있는 위안부 문제를 코미디와 감성을 녹여내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상업영화로 완성했다. 각색 과정을 거치면서 특별히 중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

“전체적인 이야기 구조는 나쁘지 않았지만 인물을 다루는 방식이나 코미디는 내 연출 스타일과 조금 안 맞았다. 그래서 세 번에 걸쳐 시나리오를 고쳤다. 일단 시장 쪽 사람들은 워낙 정리가 잘돼 있었다. 특히 진주댁(염혜란)과 족발집 혜정(이상희)은 내가 잘 다루지 못하는 부분이라 전적으로 원작 시나리오에 의지했다. 대신 구청 쪽 인물들과 에피소드에 살을 붙였는데 양 팀장(박철민)을 포함해 엉뚱한 캐릭터 세 명을 새롭게 만들었다.”

▶기존 위안부 소재 영화들이 재연에 가까웠다면 이 영화는 피해자들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솔직히 그 부분이 흥미로웠다. 나는 어떤 소재이든 우회하는 화법을 즐겨 한다. 10년 전 ‘스카우트’를 만들 때도 광주항쟁을 스포츠에 접목시켜 우회적으로 접근한 적이 있다. 이번에도 위안부 문제를 정공법 대신 우회적으로 접근해보고 싶었다. 경험이 있어서 잘 할 자신도 있었지만 남들이 가보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그런데 위안부 문제는 좀 다르더라. 독도 문제는 화나는 순간이 있어도 가슴까지 아프진 않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는 우리의 가장 슬픈 역사다. 죄송스럽게도 이번 영화를 준비하면서 나눔의 집과 수요집회를 처음 가봤다. 위안부 문제를 대하는 태도는 대부분 나와 비슷할 것 같다. 늘 한 걸음 떨어져 이 문제를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계속 피할 수만은 없다. 그동안 모르고 외면했던 것을 일단 인정하고 사과하면서 내가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풀어가고 싶었다.”

▶여성 관객들은 옥분이 엄마의 무덤에서 오열하는 장면을 보고 눈물을 마구 쏟아내더라.

“그 신을 생각하면 먼저 나문희 선생님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앞선다. 마지막 촬영이라 긴장감이 풀어진 탓에 소품을 완벽하게 준비해놓지 못했다. 그게 문제였다. 리허설을 하던 중 선생님의 손에 소품으로 대충 만들어놓은 무덤 위 잡초 두 덩어리가 뽑혀 나온 거다. 연기를 공식적으로 하지 않고 리듬을 타는 분인데 얼마나 황당하셨겠나. 쥐구멍에라도 숨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이내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자기 리듬을 만들어내었다. 바로 우리가 원하는 그림이었다. 그때 정말 소름이 확 돋았다.”

▶사실 옥분 역할을 소화할 수 있는 배우는 많지 않다. 그 점에서 나문희 캐스팅은 주효했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고 나문희 선생님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선생님의 올해 나이가 77세다. 우리 영화의 배경이 10년 전인 것을 감안하면 옥분의 모델이 되었던 고(故) 김군자 할머니가 딱 그 나이였다. 영화는 중후반까지 과거 신분을 숨긴 채 일상에서 늘 마주할 수 있는 평범한 할머니의 모습으로 옥분을 그려간다. 나는 이 과정에서 ‘지붕뚫고 하이킥’ ‘수상한 그녀’ 등에서 보여준 나문희 선생님의 유쾌한 이미지를 활용하고 싶었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늘 어두운 이미지만 생각하지 않나. 그런 사람들에게 ‘아냐, 네 곁에 있는 저 할머니가 그런 아픔을 겪은 분이야’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 점에서 나문희 선생님의 카드가 절실했다. 워낙 친근한 이미지가 있는 분이라 후반부 반전에서 슬픔과 감동도 더 크게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청문회 장면에서 나문희 선생님의 긴 영어 대사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선생님의 영어 발음이 정말 좋다. 한국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F와 R 발음까지 정확하다. 성우 출신이라 외화 더빙도 많이 했고, 젊었을 때는 명동에서 DJ까지 하셨다고 하더라. 그런데도 더 욕심이 났는지 영문학 교수였던 부군은 물론, 미국 촬영에선 뉴저지에 살고 있는 따님과 손자·손녀들에게까지 발음 교정을 받았을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덕분에 제훈씨는 따로 영어 선생님을 붙여줬지만 선생님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상대적으로 이제훈의 비중은 작았지만 나문희 선생님과의 호흡은 더할 나위 없었다.

“그래서 제훈씨가 고맙다. 덕분에 옥분 캐릭터가 더 잘 살아날 수 있었다. 이번에 제훈씨와 작업을 하면서 그의 녹록지 않은 연기력이 준비와 노력, 치밀함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를 로직(논리)으로 정의하는데, 매번 자신이 펼칠 연기를 설계해놓는다고 했다. 처음엔 농담처럼 들었는데 차츰 촬영을 하면서 그 말의 의미를 알게 됐다. 보통은 영화를 순서대로 찍지 않는다. 그런데 제훈씨를 찍은 신들은 나중에 편집을 하게 되면 기가 막히게 앞의 장면과 붙는다. 그 점에서 제훈씨는 감독에게 더 고마운 배우다.”(웃음)

▶작가로 시작해 감독이 되었는데, 언제부터 영화감독을 꿈꾸었나.

“고등학교 1학년 때 배창호 감독님의 ‘기쁜 우리 젊은 날’을 보고 엄청 감동받았다. 당시에 짝사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민(안성기) 캐릭터에 완전히 동화됐고, 보면서 많이 울었다. 영화가 사람을 이렇게 바보로 만들 수 있구나, 영화가 가진 감정의 힘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그때 처음 깨달았다. 하지만 선뜻 연극영화과에 갈 수가 없어서 경영학과(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 대신 영화서클 활동을 더 많이 했다. 군대 가기 전에 생각해보니, 2년 반이나 영화패 활동을 했는데, 영화 한 편 만든 게 없다는 게 좀 억울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시나리오를 썼는데, 그 작품이 공모전에서 당선됐다. 이후 나와 코드가 제일 잘 맞는 명필름과 일을 하게 되면서 연출의 꿈도 함께 펼쳐나갈 수 있게 됐다.”

▶당신 작품들을 보면 특유의 색깔이 배어있다. 다소 올드한 정서가 그렇고, 생뚱맞은 유머도 그렇고.

“원래 자기 성격대로 인물이 나오고 영화가 나오지 않나. 특별한 개인기는 없지만, 남들 하는 건 하기 싫어하는 성격이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창작자로서 힘든 일을, 장르영화를 하면서 생경한 방식으로 승부하는 것이다. 나의 지향점이기도 한데 때로는 어정쩡한 타협을 시도해야 할 때도 있었다. 장진 감독의 영화는 처음엔 다들 낯설어했지만, 결국 감독 주도로 관객이 코드를 맞춰가게 되지 않았나. 내 얘기엔 관객이 어느 정도로 공감할까, 늘 고심이 된다.”

▶멜로에 관한 한 일가견이 있는 감독이다. 그런데 요즘 스크린에서 멜로영화 보기가 어렵다. 당신이라도 나서야 하는 거 아닌가.

“나도 정말 안타깝게 생각한다. 말씀하신 것처럼 멜로가 영화시장에서 사라지고 있다. 반면 TV드라마 장르의 대부분은 멜로다. 게다가 잘 만든다. 그래서 영화제작자들이 위축돼 있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주저할 때 나라도 나서서 만들어야 하는데 내가 좀 게으른 편이다. 아직까지 기획만 하고 있다. 하지만 멜로영화는 정말 만들고 싶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가까운 시일 안에 김현석표 멜로를 들고 찾아뵐 거다. 잘 만들 자신도 있다.”(웃음)

▶마지막으로 ‘아이 캔 스피크’가 주는 메시지를 말한다면.

“가족의 의미는 물론, 옥분을 통해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할 위안부 문제의 현재를 가슴 뜨겁게 보여준다. 사실 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어떤 문제를 두고 가만히 있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몰라서 그랬다’고 한다. 그런데 오히려 그게 또 다른 가해자가 될 수 있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해서 ‘가만히 있지 말자’는 게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다. 전 세계인이 보는 앞에서 용기 있게 증언한 그녀의 진취적인 삶의 태도를 통해 지금의 우리를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을 전하고 싶다. 우리 영화가 그 연결고리가 됐으면 좋겠다.”

글=윤용섭기자 hhhhama21@nate.com
사진제공=리틀빅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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