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과 책상사이] 가을하늘과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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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0-09 07:44  |  수정 2017-10-09 07:44  |  발행일 2017-10-09 제18면
[밥상과 책상사이] 가을하늘과 구름

참으로 오랜만에 고향 뒷산을 찾았다. 질풍노도의 젊은 시절, 주체할 수 없는 방랑벽과 밑도 끝도 없는 방황, 지적 허영과 과장된 상황인식, 능력에 대한 지독한 회의와 다소 엉뚱한 낭만적 자학, 앞이 보이지 않는 실의의 나날 등에 대한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 본 소나무 중 몇 그루는 아직도 살아남아 변함없는 푸르름으로 나를 반겨 주었다.

조그마한 저수지도 그대로였다. 중학교 때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부상으로 받은 헤르만 헤세의 ‘피터 카멘진트(향수)’를 들고 이 소나무를 찾았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소설 맨 앞부분에 나오는 ‘기름처럼 매끄러운 수면’이란 표현이 너무 좋아 낙조의 저수지를 바라보던 일, 산들바람이 불 때마다 가을햇살에 반짝반짝 빛나던 은빛 물비늘을 잊을 수 없다.

소설을 읽다가 구름에 관한 묘사에 감탄하여 뒤로 벌러덩 누워 솔가지 사이로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그 구절을 다시 소리 내어 읽던 내 모습도 그대로 떠오른다. “구름, 이 넓은 세상에서 나보다도 더 구름을 잘 알고 나보다도 더 구름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 구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을 나에게 보여다오. 구름은 흘러 다니며 눈에 위안을 준다. 구름은 축복이요 신의 선물이자 노여움이며 죽음의 힘이다. 구름은 갓난아이의 생명처럼 귀엽고 부드럽고 평화스럽다. 구름은 착한 천사처럼 아름답고 부유하고 은혜롭다. 구름은 죽음의 사자처럼 어둡고 피할 수 없으며 용서를 모른다. 구름은 엷은 층을 이루어 은빛으로 반짝이며 떠 있다. 구름은 금빛 테두리를 두르고 하얗게 웃으며 돛단배처럼 달린다. 구름은 노란 빛과 붉은 빛과 푸른 빛을 띠고서 꼼짝 않고 달린다. 구름은 우울한 은둔자처럼 꿈꾸며 희멀건 하늘에 쓸쓸히 떠있다.” 공부가 싫고 사람이 싫을 때마다 홀로 이 소나무 밑에 와서 우울한 은둔자가 되어 쓸쓸히 떠다니는 구름이 되곤 했다. ‘피터 카멘진트’에서 출발하여 ‘데미안’ ‘지와 사랑’ ‘싯다르타’ ‘유리알 유희’ ‘크눌프’ 등 헤세의 작품을 차례로 읽어나가던 중·고교 시절의 기쁘고 쓰라린 추억이 아직 가슴속에 그대로 자리 잡고 있다.

옛날을 생각하며 재킷을 벗어 깔고 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정완영 시인의 ‘가을하늘’을 읊조려 보았다. “선 위에 앉아 있는 제비들이 날아갑니다/가을 하늘 푸른 건반을 두드리며 날아갑니다/하늘엔 음악이 흐르고, 흰 구름이 흘러갑니다” ‘가을 하늘이 푸른 건반’이라 생각하며 손, 팔, 다리를 허공에 휘저어 보았다. 한참 후 동작을 멈추고 고요히 숨을 고르니 솔바람이 향기롭게 코를 간질이며 다가왔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한 말도 들려왔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을 향해 나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오늘의 부모는 자녀들에게 무엇을 해주고 있는가. 지금 아이들에게도 이런 경험은 반드시 필요하다.

윤일현<지성교육문화센터이사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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