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구로에서] 이승엽을 존경하며

  • 유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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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0-11   |  발행일 2017-10-11 제38면   |  수정 2017-10-11
23년간 프로야구판 흔든
살아 있는 전설 이승엽
자랑스러운 대구 사람
인의예지 4端까지 갖춰
인생의 2막도 건승하길
[동대구로에서] 이승엽을 존경하며
유선태 체육부장

기자는 아직까지 존경하는 사람이 없다. 시대와 나라를 떠나 본받을 만한 인생을 살아온 분들이 많다. 스스로를 돌이켜 보면 짧지 않은 삶을 살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들 중 몇몇에게서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었던 귀한 가르침을 받았다. 사숙(私淑)했던 분도 여럿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존경할 만한 분이다. 그러나 누구를 특정해 존경하지는 않았다. 기자가 남들보다 잘난 것도 아니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적 사고’를 가진 건 더더욱 아닌데 말이다. 그 이유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런데 요즘 들어 존경할 사람이 생겼다. 기자보다 열 살이나 어린, 갓 불혹에 들어선 젊은이(?) 이승엽이다. 그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사단(四端)을 갖춘 자랑스러운 대구인이다.

이승엽은 23년간 한국과 일본 프로야구판을 휘저었던 당대의 ‘슈퍼스타’다. 중심타자, 국가대표 등 많은 압박을 받으면서도 한 번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자기 역할을 해냈다. 아파도 참고 또 참았다. 자신을 지켜보는 국민들을 실망시킬 수 없었다. 이승엽을 능가하지는 못했지만 버금갈 정도의 실력을 가졌던 선수는 여럿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겐 ‘슈퍼’라는 수식어를 쉽게 붙이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오지심(羞惡之心)이다.

정확한 시점은 기억해 낼 수 없지만 언젠가부터 홈런을 친 이승엽에게서 특이한 걸 발견할 수 있다. 공이 담장을 넘어가는 걸 확인하면 이내 고개를 숙이고 1루로 달린다. 그라운드를 돌 때 환호하는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거나 불끈 주먹 쥔 손을 들었다 놨다 하며 잘난 자신을 뽐내고 싶지만 그냥 무표정하다. 더그아웃에 들어왔어도 과한 세리머니는 하지 않는다. 이승엽은 가끔 사구(死球)로 진루한다. 전언에 따르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프다. 마흔이 넘은 이승엽이 때론 스무 살 넘게 어린 조카 같은 후배한테 맞으면 화가 치밀어 오를 수도 있을 텐데 아무런 액션 없이 그냥 진루한다. 이승엽은 홈런을 쳤을 때, 사구에 맞았을 때 상대 투수의 얼굴을 절대 보지 않는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지난 여름 올스타전 때 KBO는 이승엽을 위해 다양한 이벤트를 준비했다. 하지만 이승엽은 조용히 떠나고 싶다며 손사래를 쳤다. 시즌 막바지에 들어서자 KBO는 전국을 돌며 9개 구단 원정 팬과 작별 인사를 나눈 뒤 마지막으로 대구 홈 팬을 만나는 ‘이승엽 은퇴투어’를 기획했다. KBO는 출범 35년 만에 처음으로, 은퇴하는 특정 선수 한 명만을 위한 행사를 기획한 만큼 성대하게 치르려 했다. 하지만 주인공은 간소하게 행사를 치르자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상대 구단과 후배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는 게 이유였다. 자신의 은퇴투어가 경기력에 지장을 주면 안 된다고도 덧붙였다. 사양지심(辭讓之心)이다.

8년간의 일본 생활을 마치고 2012년 시즌부터 한국리그에 복귀한 이승엽. 그의 나이는 서른일곱이었다. 한물간 선수라는 비아냥이 적지 않았지만 이승엽은 이를 극복하고 한국프로야구의 역사를 새로 쓰기 시작했다. 통산 홈런, 타점, 루타 등 타격부문 주요 기록을 갈아 치웠다. 녹슬지 않는 기량을 발휘하고 있었던 2년 전, 이승엽은 “2017시즌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하겠다”고 공언했다. 당연히 주변의 만류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다. 박수 칠 때 떠날 줄 아는 지혜와 자신이 내뱉은 말에 대해 책임질 줄 아는 용기를 가졌다. 시비지심(是非之心)이다.

이제 더 이상 그라운드에서 그를 볼 수 없다. 하지만 존경하는 그가 그라운드 밖 제2막의 인생에서도 사단(四端)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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