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단상] 재미있는 이야기는 재미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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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0-14   |  발행일 2017-10-14 제23면   |  수정 2017-10-14
20171014
박상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길고 긴 추석 연휴를 이용해 여러 종류의 책을 읽으며, 독서의 재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먼저, 평전이다. 마이클 화이트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초의 과학자’(안인희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3)를 재미있게 읽었다. 제목과 달리 예술가로서의 다 빈치 또한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고 시대 배경에 대한 설명 또한 풍성해서 이탈리아의 초기 르네상스가 어떤 시대였는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이광래의 ‘미술 철학사’(미메시스, 2017) 1권에서 같은 시대 부분을 함께 읽으며 시간여행을 하는 즐거움까지 덤으로 얻었다. 벤저민 양의 ‘덩샤오핑 평전’(권기대 옮김, 황금가지, 2004)도 봤다. 말 그대로 격동의 시대를 지내며 세상 모르는 부잣집 도련님에서 거대한 중국의 최고 권력자가 된 덩샤오핑의 삶을 통해, 중국 현대사도 배우고 시대 상황에 대한 통찰과 인간관계에서의 처신 등을 새삼 생각해 볼 기회를 얻었다.

이 기간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은 김승섭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동아시아, 2017)이다. 우리에게 생소한 분야인 사회역학을 연구하는 저자가 한국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대상으로 ‘원인의 원인’ 곧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규명하고 있다. 세월호 생존자 및 유가족,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비정규직 및 해고 노동자, 성 소수자 등 소외되고 상처 받은 사람들의 문제가 사회 문제라는 점을 알려 준다. 책 전체에 걸쳐 이들을 위무해 주고자 하는 저자의 사랑을 담뿍 느낄 수 있어서 감동적이다.

문학작품 중에서 재미있게 읽은 것은, 그리스의 소설가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의 ‘그가 미친 단 하나의 문제: 골드바흐의 추측’(정희성 옮김, 풀빛, 2017)이다. ‘2보다 큰 모든 짝수는 소수 두 개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실로 간단해 보이는(!) 수학의 난제를 해명하고자 인생을 바친 수학자의 삶을 보여 주는 소설이다. 실제 수학자들도 등장하는 가운데 가상의 주인공과 조카의 관계와 이들 각자의 삶의 양상을 축으로 전체 이야기가 구성되어 문학성 면에서도 멋진 소설이 되었다. 이런 까닭에 내게는 사이먼 싱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보다도 재미있게 읽혔다.

이러한 책들이 한층 재미있게 감명 깊게 읽힌 것은, 읽다가 그만둔 두 부류의 책들이 비교 대상으로 놓인 까닭이다. 첫째는 몇몇 장르문학 소설이었고 둘째는 저명한 원로작가의 최근 소설이었다. 근래 나온 국내외의 SF와 추리소설들 중 몇 권을 읽다가 중간에 덮고 말았다. 사건의 설정과 전개는 재미있게 되어 있는데 바로 그뿐이어서, ‘그래서 뭐 어쨌다고?’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재미 플롯상의 기묘함만 있을 뿐 무언가를 알게 하지도 않고 탐구하거나 묻지도 않기에 싱거워졌던 것이다. 독자로서의 내 개인적 취향과 관련된 것이겠지만 ‘이야기의 짜임이 주는 재미’만 있는 소설은 재미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진짜 재미있는 이야기는 무언가를 알게 깨닫게 생각하게 해 주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읽다가 그만둔 또 한 가지 경우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국민이 다 알다시피 유명한 원로작가 J가 올해 발표한 소설로 사교육 문제를 다룬 것인데, 빤한 내용을 내내 가르치려고만 드는 것이어서 끝까지 읽어낼 수가 없었다. 경제 민주화를 주제로 해서 똑같은 태도로 재작년에 써 낸 소설은 착한 학생처럼 참고 읽어본 터라, 삶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소설을 한 편 더 읽어 줄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문제도 답도 미리 정해져 있어서 어떠한 탐색도 없는 소설 또한 아무리 재미있게 쓰였어도 재미가 없다.

사람 사는 세상을 살피는 책들,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문제를 헤아려보는 책들이야말로 내게 진진한 재미를 준다. 이러한 재미를 알지 못하고 그저 재미만 있는 이야기에서만 재미를 맛본다면, 재미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박상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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