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神, 천재들의 요람 선산 壯元坊Ⅱ .6] 엘리트 중의 엘리트 ‘정초(鄭招)’- <상>삼강행실도와 회례문무악장 편찬에 기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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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0-16   |  발행일 2017-10-16 제13면   |  수정 2017-10-26
[조선 문과] 태종 5년(1405)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을과 2위[亞元]·태종 7년(1407) 정해(丁亥) 중시(重試) 을과2등 4위
과거 두 번 급제하고 세종의 두터운 신임…삼강행실도 발문 지어
20171016
우리나라와 중국의 서적에서 군신·부자·부부의 삼강에 모범이 될 만한 충신·효자·열녀의 행실을 모아 만든 삼강행실도. 정초는 삼강행실도의 주요 내용과 간행 경위, 날짜, 저자 등의 전반적인 사항을 축약한 발문을 짓는 데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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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58권, 세종 14년 12월10일 을미 다섯번째기사. 세종임금이 대제학 정초·참판 신장·제학 정인지에게 명하여 회례의 문무 악장을 짓게 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농서(農書)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한 정초(鄭招)는 선산 장원방 출신 중 손꼽히는 인재다. 사헌집의(司憲執義, 정3품)를 지낸 정희(鄭熙)의 둘째 아들로 어릴 때부터 명석하고 총명하기로 유명했다. 한 번만 보고 들어도 단번에 암기하는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그의 일화가 ‘용재총화’에 실릴 정도였다. 태종 5년(1405) 식년시에 부장원에 올라 벼슬길에 나아갔고, 태종 7년(1407)에는 중시 을과2등(乙科二等) 4위를 차지하는 등 두 번의 과거시험에 급제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세종임금의 신임이 두터워 농사직설을 비롯해 윤리서인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의 발문을 짓고 음악서인 ‘회례문무악장(會禮文武樂章)’을 편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장영실 등이 만든 천문 관측대인 간의대 제작을 관장하는 등 조선의 과학사업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1. 장원방의 천재 소년

장원방 사람 사헌집의 정희는 오늘도 아들 정초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들은 총명하다거나 영특하다거나 하는 말로는 표현이 부족한 아이였다. 기억력이 어찌나 비상한지 평소에도 깜짝깜짝 놀라곤 했는데, 그날 일은 특별히 더 대단했다.

낮에 일이 있어 정초를 데리고 절에 다니러 간 길이었다. 법당을 지나 요사채(승려의 생활공간)를 지날 때였다. 방 안에서 ‘금강경(金剛經)’을 읽고 있는 스님이 보였다. 정초가 걸음을 멈추고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저 정도는 한 번 보면 외울 수 있습니다.”

정희는 당황했다. 아들 정초의 말을 들은 스님도 다르지 않았다.

“소학(小學) 한두 쪽도 아니고 이 어려운 금강경을 한 번 읽고 외겠다고?”

그런데 정말 외운 것이다. 물 흐르는 듯한 암송이 진심으로 놀라웠다. 이에 민망해진 스님이 급기야 자리를 뜨고 말았는데도 정초는 끝까지 다 외워내고서야 입을 다물었다.

가장 오래된 농서 ‘농사직설’ 편찬
사헌집의 지낸 정희의 둘째 아들로
선산 장원방 출신중 손꼽히는 인재
어릴적부터 명석·총명하기로 유명

궁중의 잔치음악 ‘회례문무악장’
역서 ‘칠정산내편’ 편찬도 주도


정희도 명석한 사람이었다. 고려 1376년(우왕2)에 진사시(進士試)에서 장원을 차지한 데 이어, 곧이어 치러진 병진방(丙辰榜)에서는 동진사(同進士) 3위에 올라 벼슬길에 올랐다. 그런데 아들 정초는 아버지를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정초는 성장할수록 더 빛이 났다. 사마시(司馬試, 생원진사시)를 며칠 앞두고 있었던 일은 그 중 압권이었다. 태평하게 놀기만 하던 정초가 방대한 분량의 육경(六經)을 대충 훑어보기만 하고도 단박에 합격한 것이었다. 훗날 중종 때, 성현(成俔)이 정초에 대해 자신의 문집 ‘용재총화’에 ‘학문을 널리 익힘에, 한 번 보면 곧 외우고 붓을 들면 곧 문장을 이루었다’고 싣기까지 했으니 부연 설명이 필요없는 셈이었다.

당연히 과거시험 성적도 좋았다. 정초는 1405년(태종5) 4월21일, 식년시(式年試) 을유5년방(乙酉五年榜)에서 을과(乙科) 아원(亞元, 2위)을 차지했다. 합격과 함께 내자직장(內資直長)으로 임명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407년(태종7) 4월18일, 당시 예문검열(藝文檢閱, 정9품)이었던 정초는 다시 한 번 시험을 치렀다. 승진시험인 중시(重試) 정해7년중시방(丁亥七年重試榜)이었다. 여기서 정초는 병과(丙科) 4위에 이름을 올리고 좌정언(左正言, 정6품)을 제수 받았다.

#2. 삼강행실도의 발문을 책임지다

1428년(세종10) 9월27일, 어전에 침통한 기운이 흘렀다.

“진주에 사는 김화라는 자가 제 아비를 죽였다 합니다. 능지처참의 중벌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형조의 보고는 엄중했다. 충격으로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세종에게서 무거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내가 남편을 죽이고 종이 주인을 죽인 적은 있으나, 이젠 저를 낳아준 아비까지 해치는구나. 다 내가 덕이 없는 탓이다.”

임금의 자책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판부사(判府事) 허조가 고개를 조아렸다.

“저 또한 60년을 넘게 살아오는 동안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엄히 다스려야 할 죄입니다.”

“옳다. 하나 율문(律文, 형률의 법조문)을 건드리는 데는 무리가 있다. 하니 방책을 궁리해보라. 나 또한 고민하겠다.”

그리고 10월3일, 그 문제를 놓고 회의가 소집됐다. 판부사 변계량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효행록(孝行錄)과 같은 책을 만들어 널리 보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옆에 두고 항상 읽다 보면, 효(孝)와 예(禮)가 익숙해질 것입니다.”

세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직제학(直提學) 설순에게 일렀다.

“세상 풍속이 날로 악해져 자식이 자식노릇을 하지 않는 불행한 일까지 생겼다. 이에 ‘효행록’을 간하여 백성들을 교화하고자 한다. 먼저 깨우침이 있어야 실천이 따라오지 않겠느냐. 우선, 전에 편찬한 바 있는 24명의 효행에 20여명의 효행을 추가하라. 또한 고려와 삼국시대의 역사를 뒤져 효행으로 알려진 경우를 수집하고, 그 또한 삽입하라. 이 모든 과정은 집현전에서 도맡도록 하라.”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집현전 학자들이 달라붙어 중국과 우리나라의 수많은 서적을 모아 일일이 확인하는 일이 첫 단계였다. 다음으로 모범적인 사례를 골라내고, 충신·열녀·효자로 구분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름난 화공들로 하여금 내용에 맞는 그림을 그려 넣어 편찬을 마무리했다. 이윽고 1433년(세종15),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가 완성되었다. 무려 5년간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세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정초는 삼강행실도의 발문(跋文)을 지어 올렸다. 발문은 본문의 대략적인 내용, 간행 경위와 날짜, 저자 등 관계되는 사항을 간략하게 적어 책 끝에 붙이는 글을 이른다. 당시 정초는 1429년에 농서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한 데 이어, 바로 전 해인 1432년부터는 역서(曆書)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의 편찬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만큼 세종이 믿고 의지하는 바가 큰 인물이었다. 정초가 올린 삼강행실도의 발문은 명확하고 명쾌했다.

‘오늘사람이 옛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음성과 모습 또한 알지 못하는데, 과연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미워하겠는가. 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곧고 어질고 고상하고 결백한 사람을 보면, 사모와 존경의 마음이 일어 험한 일이라도 돕고픈 마음이 든다는 것. 반면 구차하고 천하고 더럽고 추한 사람을 보면, 침 뱉고 꾸짖는 것만으로는 모자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분노가 일게 마련이라는 것. 그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니 찬양할 만한 인물을 직접 본다면 오죽하겠는가. 감동은 깊고 깨달음은 더 빠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바로 중요한 의미가 될 것이다. 사람이라면 반드시 예의의 행실을 알게 될 것이며, 가정에는 효와 정절의 풍속이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유념할 것이 있다. 자식이 그의 부모에 대하여, 살아있을 때 봉양하고 죽은 후에 제사를 모시는 것은 일반적으로 행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아내가 정절을 지키는 것은 남편이 죽은 뒤에나 있는 일이고, 충신이 절의를 다하는 것은 나라가 어지럽거나 망해야만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알겠는가. 그럼에도 방법은 있다. 아내가 항상 예를 따라 남편을 돕고 그 가족을 사랑하며 그 가업을 융성하게 하면, 그것이 곧 정절을 다하는 것이다. 신하가 나라 근심하기를 자기 집안일같이 하고 충과 의로써 군왕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면, 그것이 곧 충절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니 ‘삼강행실도’를 통한다면 어찌 해야 할 것인지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3. 회례악을 뜻있게 다듬다

정초는 진실로 두뇌가 비상한 사람이었다. 실제 ‘세종실록’에는 정초를 두고 ‘총명함과 비범함이 뛰어났고, 경서(經書)와 사기(史記) 등의 학문을 비롯해 책력과 산술, 복서(卜筮, 점)에 이르기까지 모두 통달하였다. 게다가 관리의 재질까지 갖추고 있어 나라의 의제(儀制, 의식이나 제도)를 정할 때 숱하게 참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중 ‘의제’에 해당하는 업적이 바로 ‘회례문무악장(會禮文武樂章)’ 편찬이었다.

회례악(會禮樂)은 궁중의 예연의식(禮宴儀式), 즉 예를 갖춘 잔치 때 연주하는 음악을 이른다. 세종은 그 회례악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바로 할아버지 태조와 아버지 태종의 공덕에 대한 찬양이었다. 이에 세종은 1432년 12월10일, 당시 대제학(大提學)이던 정초와 참판(參判) 신장, 제학(提學) 정인지 등에게 회례의 문무악장(文武樂章)을 짓도록 명을 내렸다.

당시 정초는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판이었다. 하지만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천재라 일컬어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다. 정초는 신장, 정인지 등과 더불어 집필에 들어갔고, 완성했다.

그들의 작품이 첫선을 보인 회례연 날이었다. 등가(登歌)에만 해도 도창(導唱, 지휘자) 2인과 악공 62인이 동원되었고, 헌가(軒架)에는 무려 악공 132인이 참여했다. 등가와 헌가란 자리를 나누어 배치된 악대를 일컫는다. 비교적 높은 곳인 당상(堂上)이 등가, 그보다 낮은 곳인 당하(堂下)가 헌가였다. 그리고 문무(文舞)에는 50인, 무무(武舞)에는 58인의 악생(樂生)이 나와 춤을 추었다.

곡조에 맞추어 노래가 울려 퍼졌다.

‘아름다울사 빛나는 태조시여. 천명에 응하시고 인심에 순하시어 우리나라를 세우셨도다. 무위(武威)를 거두시고 문치(文治) 또한 높이시니, 후세에 복을 무궁히 드리우셨도다.’

노래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름다울사 밝으신 태종이시여. 난리를 바로 잡으시고 바름으로 돌아오게 하시니, 백성이 서로 기뻐하도다. 사방에 근심 없으니, 그 놀라운 공력이 크게 번성하였음이라.’

쓰인 문자 하나하나 품위가 있고 그 흐름이 아름다워, 모든 이의 귀에 듣기 좋았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참고문헌=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조선왕조실록, 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도움말=박은호 전 구미문화원장
공동 기획:구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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