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진단] 다시 도진 습관성 나라 걱정

  • 이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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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0-17   |  발행일 2017-10-17 제30면   |  수정 2017-10-17
富國强兵·有備無患하라는
수백년 거듭된 경고에도
아직 제대로 懲毖 못하는
역사적 적폐야말로
지금 청산할 진정한 적폐
[화요진단] 다시 도진 습관성 나라 걱정

‘남한산성’을 보러 영화관을 찾던 날 문재인 대통령은 안동 류성룡 종택(충효당)을 방문했다. ‘안동이라면 관심사였던 임청각(이상룡 생가)을 찾겠지’라고 지레짐작했다. 그런데 류성룡 종택이었다. 왜 충효당이었을까. 언론은 ‘문 대통령, 첫 TK 방문’에 의미를 뒀지만 적절한 해석은 아니었다. 문재인정부는 메시지의 스토리텔링에 특장있지 않은가. 의미있는 메시지를 던지려했을 것이다. 남한산성을 관람하는 동안 의문이 풀렸다. 300여년 전 조선의 운명에서 지금의 처지를 말하려 했음이 분명했다. 영화 남한산성과 대통령의 충효당 방문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그 메시지를 ‘부국강병’과 ‘유비무환’이라 읽었다.

영화 남한산성, 임청각·충효당은 안동과 인연이 깊다. 수백년 이래 3대 환란을 꼽으라면 임진왜란(1592), 병자호란(1636), 일제 강점기(1910~1945)다. 그 역사적 고비마다 중심에 섰던 3인, 류성룡(임란 당시 병조판서·영의정), 김상헌(병란 때 예조판서), 이상룡(일제강점기 임시정부 국무령) 모두 안동이 배출한 인물이다. 안동에서 생활하는 필자에게 남한산성 관람과 대통령의 충효당 방문은 같은 시각 다른 장소에서 벌어진 하나의 이벤트였다. 영화는 실제와 다소 달랐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굴욕를 당하자 자결하는 것으로 나오는 김상헌은 실제 죽지 않았다. 그는 곧장 선영이 있는 안동으로 내려왔다. 3년 뒤 청으로 압송되기까지 복수심을 키우며 북벌 구상을 가다듬은 곳이 안동이다.

영화는 척화파 김상헌과 주화파 최명길의 논쟁을 비중있게 다뤘지만, 고립무원 조선의 운명과 ‘힘 없는 외교’의 무력함이 시종 가슴을 짓눌렀다. 청의 신무기 홍이포가 산성 안으로 불벼락치자 목숨 걸고 벌이던 주화-척화파 간 설전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김상헌·최명길 모두 충신으로 만들고, 주화-척화 어느 쪽 손도 들어주지 않으려는 감독의 의도가 엿보였지만, 영화 내내 머릿속을 맴돈 것은 다른 데 있었다. ‘국가의 제일 책무는 백성의 안위(安危)고, 이를 확실히 보장하는 것은 힘뿐이다’라는 사실이었다.

임진왜란도 병자호란 못잖게 백성들에게 고통을 줬다. 그때도 일본을 정탐하고 돌아온 황윤길과 김성일의 논쟁이 있었다. 논쟁으로 날밤 새우다 침략에 대비 못한 것도 마찬가지다. 다행히 류성룡이 있었다. 스승 이황이 ‘하늘이 내린 인재’라 했던 류성룡의 선견지명은 탁월했다. 왜란에 대비해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발탁하고, 권율을 국경 요충지 의주로 보낸 것은 신의 한 수였다. 그가 눈물로 쓴 ‘징비록’은 다시는 같은 전란을 겪지 않도록 반성하고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징비(懲毖)란 ‘미리 징계해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니 후세에 경계(警戒)하고자 했던 간절함이 묻어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병자호란을 겪고도 ‘힘 길러 대비하라’는 역사적 명은 외면됐다. 한일합방과 6·25전쟁을 맞았으니 통탄할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솔직한 언급은 가슴을 멍 하게 했다. “안보상황이 어려운 것은 외부에서 안보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도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의 언급이 ‘내부 결속’에 방점을 찍었더라도 ‘안보위기에 주도적 해결 여건 안 된다’에 눈길이 더 꽂힌다. 스스로 지킬 힘을 키우지 못하고, 국론은 분열된 채 주변국에 끌려다니는 처지가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이 지난 환란 당시를 연상시킨다. 어찌 문재인정부만의 탓이겠는가. 수모를 수백년간 반복하면서도 ‘징비’하지 못한 역사적 적폐와 무책임 때문이다. 진정 청산할 적폐가 있다면 이런 역사적 적폐가 아니겠는가.

국민의 걱정이 커지고 있다. 대통령의 ‘한반도 운전자론’은 잠시 자긍심을 자극했을 뿐이다. 운전대는커녕 운전석에 앉지도 못한 상황이다. 어지러운 국내외 정세로 국민의 습관성 나라걱정이 도진 듯하다. 평범한 것에서 길을 찾듯, 그래서 부국강병과 유비무환을 다시 생각한다. 약육강식은 동물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고 점잖은 ‘외교’에도 살아움직이는 철칙이다. 이재윤 (경북본사 총괄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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