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칼럼] 적폐청산 대 정치보복

  •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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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0-20   |  발행일 2017-10-20 제27면   |  수정 2017-10-20
[조정래 칼럼] 적폐청산 대 정치보복

한더위도 멀찌감치 물러난 요즘 국민들은 때아니게 왕짜증이 난다. 숫제 눈멀고 귀를 막고 싶지만 들려오느니 말싸움이고, 이전투구다. 한쪽은 적폐청산을 읊조리고, 다른 한쪽은 정치보복이라며 핏대를 올린다. 말의 전쟁이고 프레임 씌우기다. 국민을 피곤하게 하는 게 정치권의 특긴가. 국정감사장에 감사는 없고 적폐 공방만 난무하니,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은 종잡기가 어렵다. 프레임에 갇히기는 기자도 마찬가지, 판단마저 헷갈리는 시국이다.

지금이 한가하게 적폐논쟁에 빠져 있을 때인가. 김정은과 트럼프가 말 폭탄을 주고받으며 실제 폭탄이 날아올지도 모르는 안보위기에 남남갈등이 웬말인가. 과거사를 파느라 미래를 저당잡혀서야 어떻게 희망을 얘기할 수 있겠나. 으레 터져나오는 걱정과 우려의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는 시점이지만, 이러한 충고마저 꼰대의 잔소리쯤으로 넘겨버리는 세태가 안타깝다. 한마디로 적폐청산도 맞고, 정치보복도 틀리지 않다. 두 진영 간 격돌에는 이른바 양시론(兩是論)이 안성맞춤이다. 복잡하고 어려울수록 단순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이명박·박근혜정부 당시의 블랙리스트, 댓글 정치공작 등 의혹에 대한 수사에 대해 ‘적폐청산’이라는 의견이 65.0%, ‘정치보복’이라는 의견이 26.3%로 집계됐다. 그런데 지지정당별로 보면 민주당 지지층은 92.9%가 적폐청산이라고 한 반면 자유한국당 지지층은 83.5%가 정치보복이라고 보았다. 이보다 더 확실하게 견해가 갈리기도 어렵겠다. 박근혜 어법으로 표현하자면 ‘적폐청산이라고 쓰고 정치보복으로 읽는다’고 해도 무방하지 않은가.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피 튀기는 이 같은 정쟁에 박근혜 전 대통령이 가세하면서 오리무중의 정국에 혼미를 더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구속이 연장된 직후 열린 재판에서 “법치의 이름을 빌린 정치보복은 저에게서 마침표가 찍어졌으면 한다”며 문재인정부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변호인단까지 전원 사퇴하면서 여론전에 돌입했는데 선거의 여왕이었던 박 전 대통령의 정치적 승부수가 이번에도 통할지 주목된다. 이에 앞서 이명박 전 대통령은 추석인사 형식을 빌려 문재인정부의 적폐청산 작업과 관련해 “이러한 퇴행적 시도는 국익을 해칠 뿐 아니라 결국 성공하지도 못한다”고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이에 홍준표 한국당 대표는 “국가 지도자는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여야지 동정을 받으려 해서는 안된다”고 입바른 소리를 했다. 막말만 아니라면 난마처럼 얽힌 사안을 단순하고 명쾌하게 정리·정의하는 그의 능력은 달인의 경지다.

문제는 과잉이다. 적폐청산을 ‘국정 1호’로 삼고 거기에 다 걸기를 하면 피로감을 초래하고 종국에는 부메랑을 맞게 된다. 보복은 보복을 부른다. 더욱이 적폐청산이 대의명분에 부합한다 하더라도 수단과 방법이 졸렬하면 국민적 지지를 얻기 힘들다. 이를테면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구속연장 여부가 결정되기 하루 전에 그에게 불리한 세월호 보고시점 조작 의혹을 흘리는 건 누가 봐도 비겁한 꼼수이고 ‘아니올시다’이다. 잔머리 굴리지 말라, 국민은 그 잔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다고 했다. ‘적폐청산 논란 등에 당당히 대응하라’는 이낙연 국무총리의 당부만 홀로 빛난다. 그는 국무회의에서 “적폐청산은 특정 세력이나 특정 개인을 겨냥한 기획사정도 보복사정도 아니며, 민주적 기본질서를 심각하게 위협하거나 규모가 큰 불법을 바로잡는 일”이라고 규정했다. 그의 일침은 야권보다는 오히려 여권에 던진 가이드라인으로 읽힌다.

적폐청산은 어느 정부에서든 반드시 해야 하는 일로 당위성과 영속성을 지닌다. 하려면 제대로 철저하게 해야 하는데 항상 이게 안되니 사달이 났고 동티가 났다. 광복 이후 우리 현대사에서 반민특위, 4·19, 5·18, 6·10 등 의거와 혁명들이 미완의 개혁으로 남아 있는 것도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온정주의와 다정이 쇄신의 걸림돌이었다. 몸 안의 암 덩어리를 예외없이 도려내지 않은 까닭에 ‘역사 바로 세우기’는 재발된다. 정치보복 혐의 역시 언제든 받게 돼 있다. 야권의 반발과 정치공세에 질식하지 않으려면 설득력 있는 적폐청산 청사진과 로드맵이 나와야 한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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