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맹의 철학편지] 페미니즘 문제에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

  • 인터넷뉴스팀
  • |
  • 입력 2017-10-20   |  발행일 2017-10-20 제39면   |  수정 2019-03-20
20171020

“대부분의 여성은 아이의 재생산자이다. 그녀들은 사회적인 결정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그녀들은 거의 노동에 접근할 수 없고, 그녀들이 노동시장에 있을 때조차 그녀들은 생산에서 실제로는 남성들과 완전히 평등하지 않다. 그녀들은 생산의 특정한 부문들로 한정된다. 그녀들은 맨 처음 해고된다. 그녀들은 노동자로서, 시민으로서, 혹은 정치활동에서 가치를 부여받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그녀들이 노동을 할 때조차, 사회가 그녀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녀들이 계속해서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사적 소유제 안에서 남성(아버지)에게 봉사하고 국가에 봉사하는 기계들이 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제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뤼스 이리가레)

태형아, 오늘은 벨기에에서 태어난 페미니스트 철학자인 이리가레의 말을 인용하였다. 이렇게 길게 인용한 이유는, 이제는 통념으로서 대체로 당연하게 인지되는 이 이념이 그렇게 간단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때문이야. 사실 남성의 입장에서 페미니즘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나에게, 그리고 대부분의 남성에게는 어려운 일이야.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칸트의 ‘물자체’처럼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는 저 너머의 그 어떤 것처럼 말이야. 왜 이런 곤란들이 생겨나는 것일까? 그리고 이 곤란의 정체는 무엇일까?

많은 진보적 남성은 자신들이 페미니즘 문제에, 혹은 남녀평등의 문제에 제대로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나도 그 중 하나일 수 있고. 그래서 그들 남성은 위에서 내가 인용한 말 정도는 진심으로 이해하고 주장할 거라고 생각해. 그러나 과연 ‘평등 사회 건설’ 등등의 말이 페미니즘의 열쇠 말인 것일까? 유감스럽지만 나는 진보적이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많은 남성이 집에서, 자신의 주변에서 여성들에게 ‘마초적’이고 심지어 폭력적이기도 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어.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

남녀평등의 이념은 18세기 서구 계몽주의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겠지. 그런데 이러한 계몽주의에서 인간은 추상적이고 등가적인 인간일 뿐이어서 남성과 여성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어. 오로지 있는 것은 사회·경제적 제도에 의한 차별이 존재할 뿐이고, 이러한 차별적 제도가 없어진다면 남녀평등은 가능하다는 결론이 도출될 수 있겠지.

물론 아주 당연히 이러한 사회적 차별의 해소를 통한 노동 기회의 평등한 부여는 아주 중요한 쟁점일 거야. 그러나 차별의 문제에서 ‘성적 차이’의 문제로까지 더 나가지 못한, 계몽주의적 사고가 가진 근대적 한계는 지적되어야 할 거야.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근대 정치 이데올로기가 전제하고 있는 ‘보편적 개인’이라는 사고로 포섭될 수 없는 차이가 남성과 여성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이지. 가령 수다스럽고, 변덕스럽고, 히스테릭한 것을 남성들은 비정상적인 것, 교정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할 뿐이지 그것을 ‘성적 차이’의 문제로 사고하지는 않지. 앞서의 폭력적 남성들은 ‘보편적 지식’에 미달한 여성을 ‘보편적 개인’으로 계몽하고 있었을 테고. 그러나 이리가레는 ‘성적 차이는 우리 시대에 사고해야 할 질문들 중 하나 혹은 우리 시대에 사고해야 할 질문을 대표한다’고 말해.

태형아, 앞에서도 말했지만 페미니즘의 문제는 남성인 우리가 접근하기 난감하고 어려운 문제여서 생각에서 놓치기 쉬워. 그럼에도 이 페미니즘 문제에 우리가 가능한 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이 문제가 우리 미래 사회의 평등 자유를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축이기 때문이야.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이 진정으로 공유하는 미래 공간을 만들자는 것이 아닌가 해. 이리가레는 우리 사회의 의사결정은 모두 남성의 수중에 있다고 지적해. ‘여성들의 욕망, 여성들의 병리학, 여성들의 욕구, 여성들의 권리를 결정하는 것은 남성들’이라는 주장에 주의 깊게 귀 기울여 보자.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꿈꾸는 진보는 반쪽의 미래, 반쪽의 평등과 자유에 지나지 않을 거야.

성적 차이의 인정을 통한 성평등, 평등 속에서의 차이의 권리(여성권)…. 이러한 목표를 위해 남성인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서 있어야 할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것을 사고하기에 우리는 너무 오래 ‘남성’으로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태형아, 페미니즘이 너에게 먼 이야기처럼 들린다면 사랑의 문제를 생각해 보아라. 사랑의 문제를 통해 페미니즘을 사고해 보라는 것이지. 이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한 번 이야기해 보자. 그 동안 혹 시간이 나면 이리가레가 쓴 ‘사랑의 길’(동문선)을 한 번 읽어보렴.

‘친밀한 빛의 거주 안에서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도록 허락하는 어루만짐’. 이 책에서 이리가레가 말하는 것처럼 페미니즘, 혹은 사랑이 이런 게 아닐까 나는 생각해 본다. 시인·의사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