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단상]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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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0-21   |  발행일 2017-10-21 제23면   |  수정 2017-10-21
[토요단상] 문신
홍억선 한국수필문학관장

지난 금요일 퇴근 무렵, 시내에서 약속이 있었다. 모두 어려운 시간들을 내서 만나는 모임인지라 지각이라도 하면 민망스러울 자리였다. 시간은 급히 다가오는데 차들은 꼼지락거리며 여전히 느림보였다. 금호호텔 네거리에서 좌회전을 해서 오른쪽으로 붙이고 살살 가다보면 성당 건너편에 식당이 나온다고 했다.

하필이면 왜 이런 곳에 장소를 정했을까? 불현듯 원망의 마음이 일었다. 식당이 붙은 자리는 삼각지로터리 같은 곳이어서 들어가는 입구를 살짝 놓쳐 버리면 우회전 또 우회전을 거듭해서 크게 한 바퀴 돌아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생각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가뜩이나 쫓기는데 간판을 찾는다고 두리번거리다 그만 지나쳐 버렸다. 할 수 없이 차머리를 돌리고 또 돌렸다.

식당이 있는 골목을 찾아 막 입구에 들어섰을 때였다. 골목 중간에서 오가는 차가 맞붙어 겨우 지나가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내 앞차는 승합차였고, 마주 오는 차는 흰색의 고급 승용차였다. 승합차는 틈이 없어 끙끙대고 있는데 승용차는 오른쪽에 제법 여유를 두고 있었다. 조금만 자리를 내어주면 서로가 수월하게 지나갈 텐데도 승용차는 꼼짝하지 않았다. 승합차의 바퀴가 옴짝옴짝하는 것으로 보아 보지는 못했어도 운전자의 난감한 표정이 역력하게 전해왔다. 시간에 쫓기는 내가 애가 달아서 빵하고 클랙슨을 눌렀다.

앞차가 겨우 지나갔는데 맞은편 승용차는 제자리에 멈춰 있다. 내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몇 걸음 당겨서 이제 내 차와 승용차가 나란히 서게 되었다. 나는 창을 열고 손짓을 해가며 “아저씨요, 저쪽에 여유가 많거든요. 그냥 지나가면 되는데요”했다. 그러자 흰승용차의 검은 유리가 스르르 내려오면서 남자 얼굴이 나타났다. 붉게 기름진 얼굴이었다. 목 위로 꼭 심술궂은 불독머리를 얹어 놓은 것 같았다. 내 또래쯤 되었는데 한눈에도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느낌이 안 좋았다.

남자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쌍욕을 넘치게 퍼부어댔다. 뭐라고뭐라고 하는데 그 욕이 귀에 들어오기 전에 내 눈은 홍콩 포르노 배우들이나 입을 만한 남자의 알록달록한 남방에 가 있었다. 단추를 두어 개 풀어놓아 훤하게 드러나는 가슴에 털이 조금 보였던가도 같았다. 그보다 가슴 위를 지나가고 있는 퍼런 몸통의 문신에 눈이 쏠렸다. 남자가 움직일 때마다 청룡이 꿈틀거렸다. 반소매의 안쪽 굵은 팔뚝에도 용의 꼬리가 보일 듯 말 듯 지나가고 있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기가 팍 죽었다. 그때 왜 갑자기 30년도 훨씬 더 전에 다녀온 논산훈련소 29연대 구대장 앞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나는 “넷 알겠습니다. 제가 지나가겠습니다” 하는 명쾌한 말을 남기고 그 비좁은 틈을 쏜살같이 빠져나왔다.

식당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서 그제야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 쪽 팔린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어디에 숨어 있었던지 힘센 강자 앞에서 즉시 꼬리를 내렸다는 이 주체할 수 없는 비굴함과 나약함, 열등의식이 온몸에서 몰려 나왔다. 입에서는 연신 분노가 쏟아져 나왔다. ‘흥, 문신을 하면 다야? 지금이 어느 시절인데 아직도 저런 놈이?’ 참으로 쓸데없는 짓이었다. 상대는 벌써 지나가고 없는데 저 혼자 중얼거리고 있으니 자탄의 넋두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데 참으로 인간이란 얼마나 간사한가. 제풀에 올라간 혈압이 내리고 가슴이 차츰 진정이 되자 이런 생각이 살짝이 고개를 드는 것이었다. ‘잘 했어, 저런 놈들하고는 상대해 봐야 득 될 것 없어. 내만 손해야. 피하는 게 상책이야.’ 그러고는 얼른 모임에 늦으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약자들이 강자를 만났을 때 제대로 눈 한 번 쳐다보지도 못하고 늘상 들고 나오는 자기 방어요, 자기합리화의 수순이다.

나는 옷매무새를 살피고, 먼지 묻은 구두를 쓱 훔치고는 점잖은 걸음으로 식당 안에 들어섰다. 여기저기에서 회장님, 이 국장, 김 선생 하는 사이에 조금 전 저 더러운 강자에게 당했던 그 굴욕과 수모, 분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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